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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36회 고급 정답(2017-10-12 / 22.9KB / 5,671회)

 

한능검 36회 고급 문제(2017-10-12 / 5.40MB / 6,743회)

 

한능검 36회 고급 해설 백준기 (2017-10-12 / 2.35MB / 10,391회)

 

  - 1 - 정답: ① * 신석기 시대상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 었다(가장 오래된 유적은 제주도 고산리). 신 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 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 에서 발견된다. 신석기 시대 유적(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등)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간석기와 낚시, 바 늘 등의 뼈 도구가 있다. 그리고 빗살무늬토 기(아가리가 넓고 밑이 뾰족)가 널리 사용되 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이보다 앞선 토기로 이른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 등이 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 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 나 조개를 캐었고, 돌창, 돌화살 등으로 사 냥을 하였다. 한편, 식물의 열매나 뿌리를 채취하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뒤에는 농사 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 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신 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괭이로 땅을 일구고 조, 피 등을 재 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갈돌로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 어 먹었으며, 가락바퀴(방추차)로 실을 뽑고, 뼈바늘(골침)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 붕을 씌운 원형의 움집에서 살았다(양양 오 산리 유적이 유명). 그리고 같은 핏줄의 씨 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 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즉, 이들 은 구석기 시대 사람들과 달리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사냥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② 우경은 신라 지증왕 3년(502)에 “처음으 로 소를 밭가는 데 이용하였다”는 기록을 통 해 적어도 6세기 이전에는 도입된 것으로 보 이고 점차 확대되었다. 일반화된 것은 고려 시대이다. ③, ⑤ 철기 시대에 들어서 거푸집을 사용하 여 세형 동검을 제작하였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를 사용하였다. ④ 청동기 시대에는 거대한 고인돌이나 돌널 무덤을 축조하였다.   - 2 - 정답: ④ * 초기국가 (가)옥저와 (나)동예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 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 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 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 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 나, 풍속이 달랐고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 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 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 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 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 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동예는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 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 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 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 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 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 다. ③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 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 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 다. ⑤ 삼한은 다른 국가들이 제정일치(군장과 제사장이 일치) 국가 있는데 비해 제정분리 의 국가였다. 이는 신성 구역인 소도의 존재 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 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 서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 3 - 정답: ④ *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고구려 발전 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왕은 장수왕 (413~491)이었다. 그는 부왕인 광개토대왕릉 의 비를 세워 그 업적을 기리었고(414), 영 토가 넓어지자, 다시 안으로 체제를 정비할 필요를 느낀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대 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옮기고(427),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였는데(나 제동맹: 433년). 고구려의 침략 위협을 직접 적으로 받은 것은 백제였다. 장수왕은 3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쳐 개로왕을 죽이고 한 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475). 이 때의 고구려 영토는 아산만에서 소백 산맥을 넘어 영일만 을 연결하는 지역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충북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481). ① 고구려 영양왕(590~618) 때에 을지문덕은 수나라 113만 대군 중 30만 별동대를 살수 에서 무찔렀다(612, 살수대첩). ② 압록강 하류에서 요동으로 나아가는 요지 인 서안평(현 중국 단동)을 고구려 태조왕.차 대왕(146), 동천왕(224) 등이 끊입없이 공격 하다가 미천왕 때에 점령하였다(311). ③ 소수림왕(371~384)은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를 통하여 불교를 수용하였다(372). ⑤ 고구려는 야심많은 당태종이 집권하자 영 류왕 대(618~642)에 요하 국경선에 천리장성 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였다(631~647).    - 4 - 정답: ③ * 경주 지역의 문화유산 (가) 김유신 묘: 통일신라 시대부터 봉토 주 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 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김유신 묘가 그 대표적이다. (나) 천마총: 신라 경주 지역에서만 볼 수 있 는 돌무지 덧널 무덤은 주로 5세기 전후로 왕권이 강화되는 마립간 시대에 만들어진 무 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 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마도 가 출토된 천마총이 대표적인 예이다. (다) 첨성대(국보 31호):경주 소재. 신라 선덕 여왕(632~647) 때 천체 관측을 위해 세운 건축물로 여겨진다. (라) 황룡사 터: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 는 진흥왕 때에 건립되었고(553~569), 선덕 여왕 때 대국통인 자장(590~658)은 주변 9 개 민족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 여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하여 지어졌 다고 한다(643~645). 그러나 몽골의 3차 침 입 때(1238)에 황룡사 9층 목탑이 불에 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마) 분황사 터: 분황사는 634년(선덕여왕 3) 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현존하는 신 라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분 황사탑은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탑으로(모전 석탑),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다. ③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 다라니경은 8세기 초(751)에 만들어진 두루 마리 불경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 5 - 정답: ⑤ * 백제 성왕에 대하여 백제 성왕(523~554)은 수도를 비좁은 웅진성 에서 넓은 벌판인 사비성(부여)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538). 이 때, 중앙에 22개의 실무 관청을 두고, 수도에 5부, 지방 에 5방을 두어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그 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과 문물을 교류 하였으며, 왜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 불 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하여. 이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하 류 지역을 되찾을 수 있었다(551). 이리하여 백제는 오랜 숙원을 한때 이루었으나, 곧 동 맹국인 신라 진흥왕의 공격을 받아 한강 하 류의 땅을 신라에 빼앗겼다(553). 이에 성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 격하였으나. 관산성(충북 옥천)에서 전사하여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554).  ① 신라 지증왕(500~514)은 이사부 장군을 시키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 ②, ③ 백제 근초고왕(346~375)은 마한을 정 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 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여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331~371)을 전사시켰다. ④ 백제 웅진 시기 무령왕(501~523)은 지방 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 6 - 정답: ④ * 금관가야의 문화유산 금관 가야는 건국 설화에 의하면, 신라 때인 42년(유리왕 19) 오늘날 김해의 구지봉에 하 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수로왕 등 6명의 가 야국 시조가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금관가 야의 시조인 수로왕은 부족장 9명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한다(42).   금관 가야(대성동 고분에 많은 문화유산 출 토)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철을 중 국의 군현(낙랑)과 왜에 수출하는 교역의 중 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해상왕국으 로 번영을 누려 낙동강 하류의 여러 가야를 대표하는 맹주국으로 등장하였다. ① 칠지도:4세기 후반 근초고왕 대에 백제에 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칠지도는 강철로 만 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은 우수 한 제품이다. 이소노가미 신궁 소장. ② 하남 하사창리 철불(보물 332호): 1m 대 좌 위에 2.8m 높이의 대형 철불. 고려 초기 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대표적 철불. ③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 종, 국보 29 호): 경주 소재. 혜공왕(771) 때에 만들어진 이 종은 비천상 무늬와 구리와 주석이 환상 적인 비율(82:13) 만들어져 신비한 종소리로 유명하다. 이는 당시 신라의 금속 주조 기술 이 매우 뛰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④ 대성동 57호분 출토 종장 판갑옷 ⑤ 호우명 그릇: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이 그릇 밑 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 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보여 준다.   - 7 - 정답: ④ * 통일 신라기의 지방통치제도 통일 후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 정비하여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 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 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병렬적으로 두어 행정 업무 를 분담하게 하였다. 또한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신문 왕 때에 국학을 설립하였다(682).  지방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 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 상의 요지에는 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 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 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 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 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 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 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 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 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 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는상수리 제도 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①, ③ 고려는 성종 때에(983) 처음 12목을 설치한 이후 현종 때에 5도 양계의 지방제도 를 완성하였다(1018). 일반 행정 구역인 5도 에는 안찰사를, 국경 지역인 양계에는 병마 사를 파견하였다. ②, ⑤ 조선은 수령을 지휘, 감독하고 백성 의 생활을 살피기 위하여 전국 8도에 관찰사 를 파견하였고, 지방 사림들의 향촌 자치기 구인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중앙의 현 직 관료로 하여금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 게 하는 경재소를 설치하였다.   - 8 - 정답: ① * 발해의 경제 발해는 9세기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면서 농업, 수공업, 상업이 발달하였다. 농업에서 는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도 지었다. 특히, 목축이 발달하여 돼 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는데,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솔빈부의 말이 유명), 수렵도 활발해 모피, 녹용, 사향 등도 많이 생산되 어 수출되었다. 수공업은 철, 구리, 금은 등 금속 가공업과 삼베, 명주, 비단 등의 직물 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하였 다. 그리고 수도인 상경 용천부등 도시와 교 통 요충지에서는 상업이 발달하였다. 발해는 당, 신라, 거란, 일본 등과 무역하였 다. 특히, 당과는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 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 게 하였다. 일본과의 무역도 규모가 한 번에 수 백명이 오갈 정도로 활발하였다. 신라와 는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설하여 견직물 등의 분야에서 일정한 경제 교류가 있었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등 토산물 과 불상, 자기 등 수공업품이었다. 수입품은 귀족의 수요품인 비단, 책 등이었다. ② 조선 후기에는 외국에서 전래된 감자, 고 구마 등의 구황작물이 널리 재배되었다. ③ 고려 숙종(1095~1105) 때에는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은병)라 는 은전을 만들어 통용을 추진하였나,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④, ⑤ 조선 전기 세종 때에 농사직설(1429) 을 간행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이 장려 되었고, 일본에 3포를 개항하고(1426), 계해 약조(1443)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의 교역 이 이루어졌다.   - 9 - 정답: ① *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신라 하대에는 선종이 널리 퍼지면서 승려의 사리를 봉안하는 승탑(부도)과 탑비가 유행 하였다. 팔각원당형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승탑의 대표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868)’ 이 유명하다. ② 불국사 다보탑(국보 20호): 경주 소재. 8 세기 중엽 통일신라기에 불국사에 세워진 탑 으로 역사적 부처인 석가여래가 법화경을 설 법하자, 과거불인 다보여래가 나타나 석가여 래의 말이 참됨임을 입증한 것을 구현한 것 이다. 복잡하고 화려한 특징을 보여준다.  ③ 부석사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호):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 ④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커다란 규모이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 (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뒷편 각황전의 위용 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⑤ 월정사 8각 9층 석탑: 강원도 평창(오대 산) 소재. 통일 신라 때의 4각 3층 석탑을 넘어서 다소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다각다층 탑이 고려 전기에 유행하는데 그 전형을 보 여 준다. 즉 당시 송나라의 선진문물이 수용 되며 송나라에서 유행하던 8각탑이 수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 10 - 정답: ② * 궁예와 견훤 (가) 궁예: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양길이 휘하에서 도적 집 단을 토대로 성장하여 강원도, 경기도 일대 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 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 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 진(연호: 무태)로 바꾸었다가(904), 다시 태 봉(연호: 수덕만세->정개)으로 바꾸며(911) 황제국의 면모와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 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 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 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918).  (나) 견훤: 상주의 군인 출신 견훤은 황해안 의 해상 세력과 도적 떼 등을 자신의 군사 기반으로 흡수하여 자립하였다. 견훤은 나주 를 거쳐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900). 그는 중국(후당, 오월)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는 927년 대야성을 점령하고 이어 신라 수도 금성을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자결케 하였고, 신라를 도우러 온 왕건의 고 려군을 공산(대구) 전투에서 대패시켰다. 그 러나 왕건의 고려는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 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 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935).   한편 후계 문제를 놓고 그와 갈등하던 맏아 들 신검이 배다른 형제 금강을 죽이고 견훤 을 금산사에 감금하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 로 귀순하였고, 후백제 정벌에 앞장섰 다. 결국 일리천 전투와 황산 전투에서 왕건의 고려군은 신검의 후백제군을 크게 파하고 후 삼국을 통일하였고, 견훤도 곧 사망하였다 (936). ④ 고려 태조(918~943)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 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 11 - 정답: ⑤ * 고려 인종 때의 역사적 사실 고려 전기 최대의 문벌귀족인 경원 이씨 이 자겸은 딸들을 예종(1105~1122)과 인종 (1122~1146)의 왕비로 두어 최고의 권력자 로 행세하다 국왕의 자리까지 넘보기에, 왕 위 유지에 위협을 느낀 인종이 이자겸을 제 거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불타는 등 위기에 처했다. 이를 이자겸의 난이라 한다(1126). 그러나 얼마 후 인종은 이자겸의 부하인 척 준경을 시켜 이자겸을 제거하였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 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 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1126)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 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 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 의 개혁적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 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 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 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 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 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① 신라 말 진성여왕(887~897) 때에 상주에 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889년)을 시작 으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② 고려 태조(918~943)는 지방 호족을 견제 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유력 호 족 출신 중앙 관료를 출신 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부호장 이하직 등의 일을 맡게 하 는 사심관 제도(귀부한 신라 경순왕을 경주 사심관 삼음이 효시)를 실시하였다.  ③ 신라 말 헌덕왕(809~826) 때에 아버지 김주원(무열왕계)이 김경신(원성왕계)에게 왕 위쟁탈전에 패하자, 그 아들인 웅주(공주) 도 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다(822). ④ 강조는 어지러운 고려 왕실을 바로잡고자 정변을 일으키어 전횡을 일삼던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제거하고,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켰다(1009)   - 12 - 정답: ③ * 고려 광종의 업적 고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943~945) 과 정종(945~949)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예: 왕규의 난).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949~975)은노비 안검법(956)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 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어 후주 출신 귀화인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 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958),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으며, 지배층의 위계질서를 확립하 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960).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 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 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 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 었다. ①, ④ 고려 태조(918~943)는 흑창(춘대추납) 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였고, 정계와 계 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 시하였다. ② 고려 성종(981~997)은 국자감을 정비하여 (또는 설립)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⑤ 고려 경종(975~981)은 관리들의 직역에 대한 대가로 인품과 관품에 따라 수조권 토 지를 분급하는 전시과 제도를 처음 마련하였 다(시정 전시과, 976).    - 13 - 정답: ② * 여진 정벌과 별무반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 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 돌하였다. 고려 숙종 대에 취약한 기병을 보완하자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기(기병).신보(보 병).항마(승병)군으로 구성된 별무반(1104)을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① 정중부 무신 정권을 타도한 경대승 (1179~1183 집권)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숙 위 사병으로 도방을 설치하였다(1179). ③, ④ 도방은 최충헌 정권에도 이어져 신변 경호를 담당하였고, 최충헌을 계승한 최우는 삼별초라는 또 다른 사병기구를 두며(1219) 최씨 정권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특히 삼별 초는 항몽투쟁에 앞섰고, 개경환도에 반대하 여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항쟁하였다(1270~1273). ⑤ 통일신라기의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 는데, 9주에 1 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 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 14 - 정답: ② * 최충헌에 대하여 최충헌은 전임 집권자 이의민을 타도하고 정 권을 잡자(1196~1219 집권), 무신 정권 초기 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 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 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 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 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 감(1209)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 였다. 도방은 이후의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 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①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는 1225년 정방 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 악하며 왕권을 제약하였다. ③ 승려 출신의 장수 김윤후((?~?)는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 처인(용인) 부곡민을 이 끌고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며 무찔렀다. ④ 고려 말 공민왕(1351~1374)은 무당파인 승려 신돈(?~1371)을 시키어 전민변정도감 (1366)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에 의해 부당하 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⑤ 거란의 3차 침입(1018~1019)을 막아낸 후 강감찬(948~1031)의 건의에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다.    - 15 - 정답: ④ * 원의 간섭기(1270~1351) 때의 사회상 몽골과 강화(1270)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1274, 1281)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 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 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 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 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 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 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폐하->전하, 태자->세자, ..조.종->충..왕). 아울러 관제도 개편(중서문하성+상서성->첨의부, 6부->4 사, 중추원->밀직사)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1280)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 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 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고 순마소 (경찰 기능)를 통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 아 갔으며(결혼도감 주관), 금, 은, 베를 비 롯하여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 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 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 라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소주, 설렁탕)이 유 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호복, 연지, 족두 리, 장도), 몽골어(수라, ~치)가 궁중과 지배 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① 무신정권 최충헌 집권기에 그의 노비인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198). ② 통일신라기 원성왕(780~798) 때에 국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삼품과(788) 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③ 11세기에 종파적 분열상을 보인 고려 불 교계에 의천(1055~1101)은 교관겸수를 부르 짖으며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여 교종을 중심 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하였다. ⑤ 고려 중기 문종 때에 최충(984~1068)은 9재 학당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 16 - 정답: ① * 최영의 요동 정벌(1388)과 이성계의 즉위 사이의 역사적 사실(1392) 고려 말 공민왕, 우왕 때에 남과 북의 외적 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최 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 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 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1316~1388)이 이 성계(1335~1388)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 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 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주장하며 위화도 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 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 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 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 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1389), 조준 등의 건 의로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 였다(1391).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 선을 건국하였다(1392). ②, ④ 공민왕(1351~1374)은 반원자주정책을 실시하여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 하,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다(1356). ③ 고려 무신 정권 초기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 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1176).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 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⑤ 조선 태종(1400~1418)은 백성들의 억울 한 일을 직접 해결하여 줄 목적으로 대궐 밖 문루 위에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 17 - 정답: ④ * 도산 서원을 세운 이황에 대하여 동방의 주자라 불리우는 이황(1501~1570)은 주자서절요(주자의 주료 서찰을 뽑아 정리), 성학십도(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도식으로 설명)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이기심성론을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주리(主理論)에 입각하여 도덕 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 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 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그의 저서 ‘주자서절요’가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 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실천적으로는 서원과 향약의 보급에 힘써, 풍기군수 재직시 주세붕이 창설한 최초의 서 원인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청원하여 최 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탄생하였으며, 도산학당(후일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양성하 고, 예안향약을 보급하였다. ② 중농적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성호 사설’ 곽우록에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가구 당 최소 기본 토지인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 를 금지하고, 그 외 토지만 매매를 허용하자 는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③ 이이(1536~1584)는 ‘동호문답’을 저술하 여 수미법 등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⑤ 성리학자인 김장생(1548~1631)은 예학을 학술적 연구하여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하고 여러 학자들의 예설에 주석을 붙인 ‘가례집 람’을 저술하였다.   - 18 - 정답: ① * 수양대군(세조)에 대하여 세종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 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곧, 김종 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이 넘어 가고,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한명회. 권람, 무인 집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문 사들 집결) 간의 권력 갈등은 심화되었다. 결국 수양대군은 계유정난(1453)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과 안평대군을 제거하며 정권을 장악하고 단종의 양위를 받 아 후일 세조로 왕위에 올랐다(1455). ② 정도전(1342~1398)은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진리를 논파하고 배척을 주장한 ‘불 씨잡변’(1394)을 지어 불교를 비판하였다. ③ 숙종(1674~1720)은 5군영 중 마지막 군 문인 금위영(궁궐방위)을 설치하였다(1682). ④ 조선 태조 이성계의 5째 아들인 이방원 (태종)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1398, 1400)을 통해 반대파를 제거하며 왕위에 올 랐다 ⑤ 흥선 대원군의 집권기(1863~1873)에 비 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국 기무)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 19 - 정답: ④ * 삼짇날의 세시풍속 음력 3월 3일인 삼짇날에는 강남에 간 제비 가 돌아와 추녀 밑에 집을 짓는다는 때로, 이 무렵이면 날씨도 온화하고 산과 들에 꽃 이 피기 시작한다. 이 때에는 진달래꽃을 뜯 어다가 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 지 지는 화전(花煎)을 먹거나, 녹두가루를 반죽 하여 익힌 다음 가늘게 썰어 꿀을 타고 잣을 넣어서 먹는 화면(花麵)을 즐겨 먹는다. ①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 삼한 시대의 수릿날에 기원하여 한해 농사의 풍성을 기원 한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물에 머 리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 삼아 머리에 꽂는 등의 풍속과 함께 그 네뛰기, 활쏘기, 씨름 같은 민속놀이 등이 행해졌다. ② 칠석(七夕): 음력 7월 7일. 헤어져 있던 견우(牽牛: 목동)와 직녀(織女: 베짜는 녀)가 만나는 날이라고도 한다. 이 때는 옷과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폭의(曝衣)와 폭서(曝書) 풍속 이 있었다. 여름 장마철에 장롱속의 옷가지 와 책장의 책에 습기가 차면 곰팡이가 끼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한편 여인들 이 직녀성에 바느질 솜씨를 비는 걸교(乞巧) 풍속이 있었다.  ③ 대보름: 음력 1월 15일. 일명 상원(上元) 으로 불리운다. 한해의 풍농(豐農)을 기원하 는 의미로 쌀, 조, 수수, 팥, 콩 등을 섞어 지은 오곡밥을 먹고, 건강의 안녕을 기원하 는 의미로 땅콩이나 잣, 호두, 밤 등 부럼을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일년 내내 기 쁜 소식만 전해달라며 부녀자 애들 할 것 없 이 귀밝이술(耳明酒)을 마신다. ⑤ 한가위: 음력 8월 15일. 추석(秋夕)으로 불리우며 일 년 동안 기른 곡식을 거둬들인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상을 차려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조 상의 산소에 성묘를 한다.     - 20 - 정답: ② * 독도의 역사 독도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13 년(512)에 이사부를 통하여 우산국을 정벌했 음과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통해서 우리 영토 임이 분명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유민을 막 기 위해 울릉도민들을 본토에 옮겨 살게 하 여 한때 정부의 관리가 소홀하였다. 그러나 우리 어민들은 고기잡이를 하는 거점으로 줄 곧 활용해 왔다. 특히, 조선 숙종 때에는 동래에 살던 안용복 은 1696년 독도에서 일본인을 내쫓고 일본 막부에 항의하여 1697년 에도 막부는 울릉 도에 출어를 금지시키겠다는 서신을 조정에 보내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 인받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의 침범이 계속되자, 19 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 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대한제국 때인 1900년 10월 25일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관할케 하였다(대한 제국 정부 칙령 41호를 관보를 통해 공포).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7년 당시 일 본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태정관이 <태정관 지령문>을 통해 울릉도와 이 섬을 조선 영토로 인정하였으나, 러ㆍ일 전쟁 중 자국 영토(시마네현)로 불법적으로 강제 편 입하였다(1905.1). 이에 1906년 3월 울릉도 군수 심흥택이 독 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 왕에게 보고를 올리자, 의정부 참정대신 박 제순은 동년 5월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부인, 즉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다행히 1952년부터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독도 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의 활약)하고 있으나, 일본은 자국 영토임을 부르짖으며 끈질기게 분쟁지역으로 몰아가고 있다. ① 병인양요(1866.9) 때에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 퇴하였다. ③ 러시아가 저탄소를 빌미로 조차하려고 한 곳은 부산 절영도이다(1897). ④ 네덜란드 상인 하멜 일행이 표류해 도착 한 곳은 제주도이다(1653). ⑤ 신유사옥(1801)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용의 형 정약전(1758~1816)은 그 지역 의 어류를 조사한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 21 - 정답: ② * 북벌을 주도한 효종의 업적 인조(1623~1649) 때에 정묘(1627), 병자 (1636) 두 차례의 호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은 정부나 백성 모두가 청에 대한 적대 감정과 복수심에 불탔다. 이에 청을 쳐서 원 수를 갚아야한다는 북벌론이 일어났다.   특히,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 (1649~1659)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1659년 독대와 북벌 유명),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 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는, 청이 한족의 반발을 누르면서 중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 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 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1654, 1658)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 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 라고 한다. ① 세종(1418~1450) 대에 바퀴가 달린 화차 에 신기전(1448)을 장착하여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다. ③ 정조(1776~1800)는 국왕 친위 부대로 장 용영(장용위:1785->장용영:1793)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④ 고려 말 우왕(1374~1388) 대에 최무선 의 끈질긴 노력을 하여 화약 제조법을 터득 하자, 정부는 화통도감을 설치하여(1377), 최 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고,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 렀다(1380). ⑤ 광해군(1608~1623) 대에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토벌키 위해 심하(深河)에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적당히 싸우다 항복하 는 중립외교를 펼쳤다(1619).      - 22 - 정답: ⑤ * 정묘호란(1627) 인조반정(1623)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 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또한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에 주둔 하였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 (1624)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자,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피신하여 조선 침입을 종용하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 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 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형제관계의 화의와 조공과 국경에서의 관무역을 조건으로 철군하였다. ① 임진왜란 때에 광주 목사 권율이 군민들 과 필사적으로 싸워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행주대첩, 1593.2, 행주치마 유래). ② 세종(1418~1450) 때에는 최윤덕 장군을 시켜 압록강 상류 지역을 확보하여 북서 4군 을 설치하고(1443), 김종서 장군을 시켜 두 만강 하류 일대까지 확보하여 동북 6진을 설 치하였다(1449). ③ 중종 때에 현량과로 진출한 진출한 조광 조를 필두로 하는 신진 사림들이 급진 개혁 (훈구파 위훈삭제 등)과 관련하여, 남곤, 심 정 등의 훈구 세력의 ‘주초위왕’ 모략으로 축출되었다(기묘사화, 1519) ④ 임진왜란 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대마 도주와 기유약조(세견선 20척, 세사미 100석 이내)를 체결하여 일본과의 국교가 재개되며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 23 - 정답: ④ * 공납의 개혁 대동법 조선 후기들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농민들의 공납(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결국 대동법이 실시 되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에 경기도에서 시험적으 로 시행되고(1608, 이원익의 건의), 이어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1659년 김육의 건 의로 삼남 지방으로 확대, 1708년 완결, 평 안.함경도와 제주도 제외).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 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 는 제도였다(상공만 폐지, 별공과 진상은 여 전히 존속). 주무 관청은 선혜청이다. 농민은 대체로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 납 부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거나 적 은 농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또한 조 세를 현물 징수에서 쌀, 베, 돈으로 대신됨 으로 조세의 금납화를 촉진하였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 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 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 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농민도 대동세를 내 기 위하여 토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쌀, 베, 돈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물품의 수 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① 흥선 대원군은 호포제를 실시하여 종래 상민에게만 거둬들이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다(1871). ② 조선 후기에는 풍흉에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6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 ③, ⑤ 조선 후기 군역의 개혁인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 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고, 어세.염세.선세를 균역청에서 관할케 하는 보충책으로 해결하였다   - 24 - 정답: ④ *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 홍대용(1731~1783)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제도의 철 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 본이라고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손수 혼천의를 만들어 천체를 관 측하여 그의 문집 담헌서의 <의산문답>에서 지구가 하루에 한번씩 돈다는 지전설을 주장 하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 하였다. ①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서양 선교사가 중국에서 펴낸 기기도설을 참 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어 정조가 수원 화성을 쌓을 때에 사용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②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1750~1805)는 청 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 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 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 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③ 북학파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은 청 에 다녀온 기행문인 <열하일기>와 <양반전>, <허생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 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 였다. 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인 유수원 (1694~1755)은 <우서>를 저술하여 농업의 전문화와 상업적 경영을 통해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 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 25 - 정답: ③ * 여러 지역들의 역사 ① 울주(울산) 반구대의 바위 그림에는 거북, 사슴, 호랑이, 새 등의 동물과 작살이 꽂힌 고래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고래, 그물에 걸 린 동물, 우리 안의 동물 등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선사 시대의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 과 풍성한 수확을 비는 것으로 보인다. ② 1923년의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 쟁 의(암태 소작회 주도)는 한국인 지주와 일본 경찰에 맞서 1년간 싸워 소작료 인하를 관철 시킨 소작쟁의의 대표적 사례이다. ③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파죽 지세로 북상해 오자, 조선 정부는 삼도순변 사로 신립 장군을 보내어 충주에서 방어선을 펼쳤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 며 그들의 북상을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 고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④ 신미양요(1871.6)의 원인이 되는 사건으 로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상륙하여 약 탈을 하다 평양 군민들에 의해 불태워진 미 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서 일어났다. ⑤ 고려 시대에는 국내 상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송, 요 등 외국과 무역도 활발해 졌다. 개성 인근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는 대 외 무역의 발전과 함께 국제 무역항으로 번 성하여 아라비아(대식국) 상인들도 들어와 수은, 산호, 향료 등을 팔았다.    - 26 - 정답: ⑤ * 비변사에 대하여 중종 때의 3포왜란(1510, 지변사재상 소집) 과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상설기구화)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나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 책을 강구하였다(1517년 설치, 1555년 정식 관청).   비변사는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임 시 회의기구로 설치되었으나, 임진왜란을 거 치면서 점차 상설화 되고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전.현 의 정,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 대제학, 5군영 대장, 4도 유수),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 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국가 의 제반 사무를 소수의 당상들이 회의하여 결정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 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외척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에 흥선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의정부와 비변사의 한계를 규정, 국정 의결 권을 의정부에 이관하면서 그 기능이 약화되 었다. 이후 3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폐지되었다 (1865). ⑤ 고려 시대의 대간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으로 구성되었다.   - 27 - 정답: ② * 숙종 대의 환국 숙종(1674~1720)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 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 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 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서인 과 남인 사이에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 공하기도 하였다(일당 전제화).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외 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정치 권력은 점차 고위 관원 에게 집중 되었으며, 언론 기관이나 재야 사 족의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붕 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다.   경신환국(1680): 유악(기름먹인 장막) 사건을 빌미로(실제는 도체찰사 문제) 서인이 남인 (허적, 윤휴 등)을 몰아내고 집권.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의 노론(강경론), 소론 (온건론) 분화   기사환국(1689): 남인이 원자(장희빈 소생) 정함에서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송시열 등이 사사됨.   갑술환국(1694): 인현왕후(서인 옹호) 복위 관련, 남인이 쫓기고 서인(노론, 소론) 재집 권   ① 선조(1567~1608) 때에 인사권을 가진 이 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과 심충겸)와 공 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에서 붕당이 시작되었다(1575). ③ 현종(1659~1674) 때에 효종과 효종비의 국상과 관련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 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의 예송(기해 예송-1659, 갑인예송-1674)이 발생하였다. ④ 영조(1724~1776)의 처분으로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임오화변-1762) 이후, 집권 노 론 세력은 사도세자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원칙론을 고수한 벽파로 나뉘게 되었다. ⑤ 명종(1545~1567) 때에 왕위 계승을 놓고 외척인 소윤(윤원형)과 대윤(윤임)간의 권력 싸움과, 양편 모두에 사림이 가담하여 을사 사화(1545)가 일어나 큰 희생을 당하였다.   - 28 - 정답: ① * 균역법을 실시한 영조의 업적 탕평 정치는 영조 때(1724~1776) 자리잡았 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 교서(1725)를 반포하고, 탕평책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한 양의 성균관에 붕당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 비를 세웠다(1742).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 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 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 영하였다(완론 탕평).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 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 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 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 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역의 부 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양인의 군포 부담을 장정 1인당 2필에서 1필로 감축)을 시행하였고(1750),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 다. 속대전(1746)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다. ㉢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고자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1865~1872). ㉣ 정조(1776~1800)는 육의전을 제외한 시 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였 다(신해통공: 1791).     - 29 - 정답: ③ * 조선 후기 문화상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 의 증대를 배경으로 서당 교육이 보급되고, 서민의 경제적·신분적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서민 문화가 대두하였다.     문학에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최초: 홍길동전)의 보급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한글 소설은 영웅이 아닌 평범 한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현실적인 세계가 배경이 되었다. 격식에 구 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詩社)를 조직하였다. 김삿갓, 정수동 같 은 풍자 시인은 아예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민중과 어우러져 활동하기도 하였다. 춤과 노래 및 사설로 서민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어 표현한 판소리와 탈춤은 서민 문화 를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창과 사설로 엮어가는 판소리는 흥 보가, 춘향가 등이 유명하며, 탈춤과 산대놀 이(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 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 도 하였다.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정선의 진경 산수화와 김홍도, 신윤복 등이 그린 풍속화 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음악과 무용에서는 감정을 대담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공예에서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 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회회청 안료를 사용한 청화 백자가 유행하는 가운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다. ①, ④ 조선 전기 성종 때에 성현 등이 음악 서인 ‘악학궤범(1493)’을 편찬하였고, 서거정 은 삼국 이래로의 시문선집인 ‘동문선 (1478)’을 저술하였다. ②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인 정철 (1536~1593)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과 같 은 띄어난 가사 작품을 지었다. ⑤ 고려 말 우왕 때인 1377년 청주의 교외 에 있던 흥덕사에서 ‘직지심체요절’을 금속 활자로 찍어내었다. 이는 현존하는 세계 최 고(最古)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 30 - 정답: ⑤ * 사상(私商)이 발달한 조선 후기 경제상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어용상인인 시전상인 과 대동법으로 인해 나타난 공인(貢人) 외에 도, 18세기 이후에는 사상(私商)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 상의 활동은 도성 중심의 종루 외에도 도성 외곽의 나들목인 칠패, 이현, 송파, 누원 등 지에서도 활동하면서 시전의 상권을 잠식하 였다 ① 조선 후기에는 모내기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 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하였다. ②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 스럽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 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구나 동전인 상평 통보(1678)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③ 임진왜란으로 재정적 타격을 받은 정부가 공명첩(空名帖, 돈을 받고 이름이 없는 관직 첩을 줌)을 발급하자 상민(常民)들은 이를 이 용하여 면역(免役)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④ 조선 후기의 선상(船商)인 경강(京江) 상 인은 한강을 무대로 운송업에 종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