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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능검 35회 고급 정답(2017-10-12 / 30.5KB / 5,419회)

 

한능검 35회 고급 문제(2017-10-12 / 7.42MB / 5,938회)

 

한능검 35회 고급 해설 백준기 (2017-10-12 / 2.04MB / 9,707회)

 

 - 1 - 정답: ② * 슴베찌르개가 사용되던 구석기 시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나무 열매나 식 물 뿌리를 채집하여 먹거나 뗀석기(예: 초기 -만능 도구인 주먹도끼, 후기-슴베찌르개)로 만든 창이나 활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식량을 찾아 이동 생활을 하 였으며,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서 살거나 강 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①, 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음식을 저장 하기 위하여 흙을 구워 처음 토기를 사용하 였는데, 빗살무늬토기가 대표적이다. 또한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을 만들고 원시적 수공업이 나타났다. ③, ④ 청동기 시대에 처음 벼농사가 시작되 고 곡식의 이삭을 자르기 위하여 반달돌칼을 사용하였다. 또한 군장과 같은 지배층의 무 덤으로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 2 - 정답: ① * (금관) 가야에 대하여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 건국 설화 에 따르면 신라 때인 42년(유리왕 19) 구지 봉(龜旨峰)에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수 로왕 등 6명의 가야국 시조가 탄생하였다고 전해진다.   삼국이 중앙 집권 국가로서 국가 조직의 정 비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무렵에 가야는 연 맹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 연맹을 주도하였다.   가야는 전신인 변한 시대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 의 생산(덩이쇠를 화폐처럼 사용)과 해상 교 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 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 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 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가야 연맹은 지역적 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 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 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 황이 계속되다, 결국 신라에 의해 모두 복속 되었다(532년 금관가야 멸망, 562년 대가야 멸망) ② 부여는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12월에 거 행하였다. ③ 고구려는 제가회의라는 귀족회의에서 국 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④ 신라는 이사금 시기에 박, 석, 김의 3성 이 돌아가며 왕위를 계승하였다. ⑤ 마한의 소국으로 출발한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눈부시게 성장하여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압도하고 맹주로 발돋움하였다.  - 3 - 정답: ① * 불교를 공인한 신라 법흥왕의 업적 신라는 눌지왕(417~458) 때에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들어왔으나 부족적 전통과 이에 기반 한 신앙을 가진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여 불 교 공인이 여의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법흥왕(514~540) 때에 이차돈(?~527)이 자진 순교를 하여(목에 흰피가 났다고 함) 불교를 공인케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법흥왕은 병부와 상대등의 설치(531), 율령 의 반포와 공복의 제정(520) 등을 통하여 통 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 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527) 새롭게 성장하 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536)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 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532).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 하였다.   ② 백제 중흥을 꾀한 성왕(523~554)은 중앙 관청(22부)과 지방 제도(5부, 5방)를 정비하 였다. ③ 신라 진흥왕(540~576)은 거칠부를 시키어 ‘국사’를 편찬하였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④ 신라 지증왕(500~514)은 이사부 장군을 시키어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512). ⑤ 백제 무령왕(501~523)은 지방의 22담로 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 4 - 정답: ② * 살수대첩(612)과 안시성 싸움(645) 사이의 역사적 사실 오랜 분열과 혼란을 거듭해 온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되었다(589). 수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같은 처지에 놓인 유목 민족 인 돌궐과 연합하여 수에 대항하였고, 수의 침입을 미리 막고 전략상 유리한 지역을 차 지하기 위해 먼저 랴오허 강을 건너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였다(598). 이에 수 문제가 침공해 왔으나(1차), 고구려 는 이를 물리 쳤다.   612년에 수 양제는 직접 113만 대군을 동원 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2차). 요동성을 포 위, 공격하는 데 실패하고 바다를 건너 평양 성 부근까지 침략한 수군 또한 참패하자, 초 조해진 수 양제는 30만 명의 별동대를 투입 하여 평양성을 치게 하였다.     우중문 등이 거느린 별동대는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의 유도 작전에 말려들어 평양성 부 근까지 진군하였다가 크게 지치고 굶주려 결 국 후퇴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 틈을 타 서, 적군이 살수를 건널 때 그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그리하여 별동대 30만 명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겨우 2700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612).     그 뒤에도 고구려는 수의 공격을 몇 차례 더 물리쳐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수는 무 리한 전쟁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내란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다. 수의 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 를 엿보았다. 고구려는 랴오허 강 주위의 국 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당의 공격에 대비하 였다(631~647). 이 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 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하였다(642). 당 태종은 대당강경론자인 연개소문의 정변 을 구실삼아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 락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 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마침내 당군을 물리쳤다(645).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쳤다. ①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어 마지막 가야인 대가야를 멸망시키었다(562). ②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백제 한성을 급 습, 점령하여 개로왕을 죽이었다. ④ 660년 백제 의자왕의 실정으로 나당연합 군을 막을 군사가 없는 가운데 계백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10배가 넘는 신라군과 화랑의 활약에 무너지고 말았다. ⑤ 371년 백제 근초고왕은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던 중 평양성에서 백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었다.  - 5 - 정답: ④ * 백제 무령왕릉 백제 웅진(공주) 시기의 중국 남조(양)의 영 향을 받은 벽돌식 무덤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501~523)과 왕비임을 알려 주는 지석 (誌石)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 제 관식, 귀고리, 팔찌, 진묘수(수호 짐승) 등 3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 고구려와 발해의 굴식 돌방무덤은 모줄임 천장 구조의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 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 에 계단식 돌무지 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고구려 장군총과 유사).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 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 6 - 정답: ③ * 통일 신라의 경제 일본 도다이사는 745년에 창건되었고, ‘나 마’는 신라의 관등이고, 신라의 궁궐터 월지 (안압지) 출토 유물과 유사한 것을 통해서 통일신라임을 알 수 있다. ① 발해의 수출품 중 말은 주요한 수출품이 었는데, 솔빈부의 말이 유명하다 ②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는 고려의 무역항으 로 송, 아라비아 상인 등과 교역하였다. ③ 신라 하대의 중앙의 지방 통제력 상실을 이용하여 장보고(?~846)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828) 해적을 소탕하여 남해와 황해 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  ④ 고구려는 고국천왕 대에 실시된 춘대추납 의 진대법(194)이 있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⑤ 조선 세종은 1444년 공법(貢法)을 마련하 여 토지 비옥도에 6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부과하는 전분 6등법을 실시하였다(풍흉에 따라서는 9등급으로 나눈 연분 9등법 실시)  - 7 - 정답: ④ *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상 삼국 시대에는 미륵보살 반가상이 많이 만들 어졌다. 이 중에서도 탑 모양의 관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국보 78호: 날씬 한 몸매)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있는 금동 미륵보살 반가상(국보 83호: 부드러운 몸매) 이 널리 알려져 있다. ① 이불병좌상: 발해 동경성 출토. 흙을 구 워 만든 두 분의 부처(석가불, 다보불)가 나 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② 금동관음보살 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 장, 여말선초 작품, 라마 양식) ③ 광주 춘궁리 철불(보물 332호, 현재는 하 남 하사창리 소재): 1m 대좌 위에 2.8m 높 이의 대형 철불. 고려 초기의 지역적 특색을 보여주는 대표적 철불이다. ④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⑤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국보 119호):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되 었다. 연가 7년(延嘉七年)이라는 고구려 관 련 연호가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와 관련된 명기가 있는 불상이 남한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 8 - 정답: ④ * 흑치상지와 백제 부흥운동 의자왕으로 인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 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 는, 계백의 5천 결사대의 황산벌에서의 항쟁 에도 불구하고 나.당 연합군에 의해 결국 사 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그러나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한 산)에서 흑치상지는 임존성(대흥)에서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 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 의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 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 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1천 척 중 400여 척이 불태워지는 큰 패배를 당하여 쫓겨갔다(663). ① 삼국통일 직후의 왕인 신문왕(681~692)은 장인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였다. ②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 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③ 후고구려(901)를 세운 궁예는 영토를 확 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대동방국을 의미)으로 바꾸었다가(904) 다시 태봉으로 바꾸고(911),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⑤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 로 부흥 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 9 - 정답: ② * 북한산 순수비 북한산 순수비(국보 3호): 신라 진흥왕 (540~576)이 555년 또는 568년 이후에 세운 4개의 순수.척경비 중 하나. 한강 유역을 영 토로 편입한 뒤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 하여 세웠다. 조선 시대에 줄곧 무학대사비 로 알려졌으나, ‘금석과안록’을 저술한 김정 희(1786~1856)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원래는 서울 북한산 비봉에 자리하 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 ① 광개토대왕릉비: 만주 길림 집안 소재.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 광개토 대 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③ 단양 적성비(진흥왕, 550~551년, 국보 198호): 진흥왕이 한강 상류의 적성을 점령 하고, 야이차 등 그 지역 주민들에 대해 포 상하고 위무하는 내용. ④ 중원 고구려비(481, 국보 205호): 장수왕 이 신라의 왕을 ‘동이 매금(東夷寐錦)’이라고 하여 자국 중심의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주고 있다. ⑤ 사택지적비(654, 보물 1845호): 백제 의 자왕 때 활약했던 사택지적이 남긴 비로 늙 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 찰(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을 건 립했다는 내용. 도교 사상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 10 - 정답: ② * 발해의 유학 교육 - 창건자가 대조영이라는 것을 통해 발해라 는 것을 알 수 있다. - 발해는 유학 교육을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 는데, 당의 국자감 관제를 거의 본뜬 것이 다. ①, ③ 신라는 골품에 따른 관등 승진의 한 계가 있어(6두품은 6등급, 5두품은 10등급, 4두품은 12등급까지의 관직상한선), 통일 후 원성왕(780~798) 때에 국학의 학생들을 대상 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 리를 채용하는 독서 삼품과(788)를 마련하기 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④ 백제는 5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등을 일 본에 파견하여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⑤ 고조선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 로 8개 조항(8조법)이 있었는데, 3개 조항(살 인.상해.절도)만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 11 - 정답: ① *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고려 성종의 업적 고려 성종(981~997) 때에는 신라 6두품 출 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 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 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 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5조 치적평).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 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 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 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 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유교 중심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12목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 다. 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 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 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 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 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 도하였으며,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 앙 관제도 새로 마련하였다. ② 고려 예종(1105~1122)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7재)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양현고)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 화하였고 궁중 안에 청연각, 보문각, 천장각, 임천각 등의 도서관 겸 학문 연구소를 설치 하였다. ③ 광종(949~975)은 노비안검법(956)을 실시 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④ 공민왕(1351~1374)은 전민변정도감을 설 치하고(1366),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 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 다. ⑤ 고려 태조(918~943)는 춘대추납제인 의창 을 설치하기(986) 이전에 흑창을 설치하여 (928),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 12 - 정답: ③ * 거란족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대응책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 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 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 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 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 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94).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 때에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겨우 수천에 이 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 첩, 1019).   이후 두 나라는 전쟁을 중단하고 강화를 맺 어 사신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국방 강화에 힘썼다. 현종 때에는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았고, 그 후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 성을 쌓아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① 고려 말 우왕 대에 최무선이 끈질긴 노력 을 하여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자, 정부는 화 통도감을 설치하여(1377), 최무선을 중심으 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고, 화포를 이용 하여 진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1380). ②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1104),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④ 조선 초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세종 대(1418~1450)에는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상왕 태종의 주도 하에 이종무를 시 키어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1419).   ⑤ 13세기 몽골 항쟁이 벌어지며 최씨 무신 정권은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 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 교를 병행하면서 40여 년간 저항하였다.   - 13 - 정답: ② * 고려의 지방, 군사 제도 -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응양군, 용호군)과 수도 경 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 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 고려의 지방의 행정 조직은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최승로의 거의에 따라 12목 설치와 호장.부호장의 향리제도 마련하 였다. 현종 때에 전국을 5도(서해.교주.양광. 경상.전라)와 양계(동.북), 경기로 크게 나누 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예종 때 완성).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 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 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 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고려에서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주군·주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 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 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 정 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았고, 조세나 공물의 징수 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 가 담당하였다. ① 발해는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③ 고구려는 수도는 5부와 지방 176개의 성 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62개 성이 큰 성으로서 도독과 자사에 각각 비유되는 욕살 (褥薩)과 처려근지(處閭近支)가 성주였다. ④, ⑤ 통일 후 신라는 군사·행정상의 요지 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으며,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 14 - 정답: ⑤ * 평양의 역사 평양은 옛 고조선의 수도였고, 고구려가 장 수왕 때에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427년 천 도한 고구려 후기 수도이었다.   고려 때에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중시되어 서경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개경과 유사한 중앙부서의 분소를 설치하는 제도인 분사제 도를 실시하였다.   특히 인종 때에 서경 천도를 주도하였던 묘 청은 이 운동이 실패하자 난을 일으켰고 (1135), 명종 때에는 무신 정권에 반대하여 조위총의 난(1174)이 일어나며, 이후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받게 되었다.   조선 후기 때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며 이 지역으로 중심으로 유상이 활동하였다.   일제시대에는 1920년부터 조만식 등이 평양 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국산품애 용 운동인 물산 장려 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망이.망소이의 난(1176)이 일어난 명학소 는 오늘날 충남 공주 지역이다. ②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지역은 개성 선죽교이다(1392). ③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원산학 사가 설립된 지역은 함남 원산이다(1883) ④ 몽골의 침략 때(1238)에 소실된 황룡사 9 층 목탑이 소재한 곳은 경주이다.  - 15 -    정답: ② * 목화가 전래된 시기(1363)의 경제상 우리나라의 목화 재배는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얻어 붓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함으로써 시작 되었다.   ① 통일 직후 신라 신문왕 때에 문무 관리에 게 관료전을 지급(687)하고, 귀족의 경제 기 반이었던 녹읍을 폐지(689)하기도 하였다 ② 고려 후기 충정왕 때에 이암이 중국의 농 서인 농상집요(1349)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 밭농사 위주의 화북 농법을 위주 여서 논농사 위주의 우리 실정에 다소 맞지 않았다. ③ 고종 때에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상평통보 100배의 명목가치인 당백전 을 발행하여 물가상승을 야기하였다(1866). ④ 조선 후기 공납의 개혁인 대동법(1608)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 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 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 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⑤ 조선 후기에는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면서 왜관 개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해외 원산지 작물인 담배, 고추, 고구마, 감자, 토 마토 등이 전래되었다.   - 16 - 정답: ① * 원의 간섭기(1275~1356) 때의 역사적 사 실 - 보기의 자료는 충렬왕 1년(1275)의 관제 격하와 공민왕 5년(1356)의 기철 등 친원 세 력 숙청 사이의, 즉 원의 간섭기 기간의 역 사적 사실을 물어보고 있다. - 몽골과 강화(1270)한 이후, 고려는 두 차 례(1274, 1281)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 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 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폐하->전하, 태자->세자, ..조.종->충..왕). 아울러 관제도 개편(중서문하성+상서성->첨의부, 6부->4 사, 중추원->밀직사)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1280)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 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 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고 순마소 (경찰 기능)를 통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 아 갔으며(결혼도감 주관), 금, 은, 베를 비 롯하여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 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도 원과 강화를 맺은 이후 두 나 라 사이에는 자연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아졌고, 문물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 라 고려 사회에는 몽골풍(소주, 설렁탕)이 유 행하여 변발, 몽골식 복장(호복, 연지, 족두 리, 장도), 몽골어(수라, ~치)가 궁중과 지배 층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② 경기 지역에 한하여 과전법이 실시된 것 은 공양왕 3년(1391)이다. ③ 몽골의 2차 침입(1232) 때에 김윤후가 처 인성에서 몽골의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 다. ④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이 1170년 정변 을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옹립하며 권력을 장악하였다. ⑤ 고려 말 우왕 14년(1388), 명이 철령 이 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성 계는 위화도(의주 소속)에서 회군하여 최영 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 17 - 정답: ③ *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고려 몽고의 침입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은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 치기 위해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 조성 사업 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 치하고 개태사 주지 수기(守其)의 지휘 아래 제작하기 시작하여 고종 38년(1251)에 완성 하였다(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을 지 어 부처에 고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을 8만여 장의 나무판에 새겨 넣어서 팔만대장경판이라 한다. 팔만대장경 은 방대한 내용을 담았으면서도 잘못된 글자 나 빠진 글자가 거의 없는 제작의 정밀성과 글씨의 아름다움 등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수 한 대장경으로 꼽힌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합천 해인사(가 야산 소재)의 ‘해인사 장경판전’은 온도와 습 도가 자연스럽게 조절되도록 만들어져 우수 한 기록 보존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 화유산에,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 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되었다. ①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에 자장 율사 의 건의로(643) 이민족을 물리치기 위해 황 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였다(645). ②, ④ 직지심체요절: 1372년 경한(백운 화 상)이 부처와 조사의 게송·법어 등에서 선 (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 아 엮은 책을, 경한의 입적 후인 1377년 청 주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금속활자인 주 자로 찍어낸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 古)의 금속 활자본으로 공인받고 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⑤ 무구정광 대다라니경(국보 126호): 불국 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은 8세기 초(751)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불경 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세계에 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 18 - 정답: ③ *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제현(1287~1367)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으나(1290), 백이정(1247~1323) 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체계화 시켰고, 그 의 제자 이제현(1287~1367)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1314)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에 이색(1328~1396) 등에게 영향을 주어 성리학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공민왕 때(1367),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 리학을 더욱 확산시키며 신진사대부로 성장 케 하였다. 또한 그는 패관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역옹 패설’과 정통의식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성 리학적 유교사관을 대표하는 ‘사략’을 저술 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 한다. ② 고려 문종 때 활약한 최충(984-1068)은 해동공자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고려의 유학 을 한 차원 높였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9재 학당을 세워 유학 교육에 힘썼다. ④ 18세기 초에 정제두(1649~1736)는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 적으로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⑤ 이황(1501~1570)은 성학십도에서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라야 되며 군주의 도를 도식적으로 설명하였다.   - 19 - 정답: ④ * 고려 무신 정권기 김사미와 효심의 난 무신정변(1170)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 가 동요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예: 이의민).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 과 지배 체제의 붕괴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 이 약화되었으며, 무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 하여 수탈이 강화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견 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 다.   제일 먼저 문신 출신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 은 정중부, 이의방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폐 위된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1173), 이어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발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 켰는데(1174~1176), 이 때 많은 농민이 가세 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이어 남부 지방에서도 농민 항쟁이 발생하였 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 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 로 봉기하였다(1176).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 였다.   경주 주변 지역인 운문(청도), 초전(울산)에서 는 김사미와 효심이 신라 부흥 운동을 부르 짖으며 봉기하였다(1193). 최충헌(1196~1219)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 다.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신분 차별에 항거하였으 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1198).  - 20 - 정답: ④ * 한식(寒食)의 세시풍속 동지(冬至)에서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 4월 5, 6일 경이다. 춘추시대 진문공과 불에 타 죽은 개자추의 고사에서 유래와 관련 있 어 불을 사용하지 않고 찬 음식을 먹으며 이 날에 보통 성묘(省墓)를 한다, ① 삼짇날: 음력 3월 3일. 강남에 간 제비가 돌아와 추녀 밑에 집을 짓는다는 때로, 이 무렵이면 날씨도 온화하고 산과 들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이 때에는 진달래꽃을 뜯어 다가 쌀가루에 반죽하여 참기름을 발라 지지 는 화전(花煎)을 먹거나, 녹두가루를 반죽하 여 익힌 다음 가늘게 썰어 꿀을 타고 잣을 넣어서 먹는 화면(花麵)을 즐겨 먹는다. ② 동지(冬至): 24절기 가운데 하나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로서 대설과 소 한 사이이다. 양력 12월 22일경으로 우리나 라에서는 ‘작은 설’이라 해서 크게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궁중에서는 이 날을 원단(설 날)과 함께 으뜸되는 축일로 여겨 군신과 왕 세자가 모여 ‘회례연’을 베풀었으며,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를 파견하였 다. 또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국왕에게 글을 올려 축하하였다. 민가에서는 새알심을 넣어 붉은 팥죽을 쑤어 먹었다. ③ 단오(端午): 음력 5월 5일. 삼한 시대의 수릿날에 기원하여 한해 농사의 풍성을 기원 한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물에 머 리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대추나무 시집 보내기,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 삼아 머리에 꽂는 등의 풍속과 함께 그 네뛰기, 활쏘기, 씨름 같은 민속놀이 등이 행해졌다. ⑤ 정월 대보름(음력 1.15): 일명 상원(上元) 으로 불리운다. 한해의 풍농(豐農)을 기원하 는 의미로 쌀, 조, 수수, 팥, 콩 등을 섞어 지은 오곡밥을 먹고, 건강의 안녕을 기원하 는 의미로 땅콩이나 잣, 호두, 밤 등 부럼을 자기 나이 수대로 깨물며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일년 내내 기 쁜 소식만 전해달라며 부녀자 애들 할 것 없 이 귀밝이술(耳明酒)을 마신다.     - 21 - 정답: ⑤ * 주자소를 설치한 조선 태종의 업적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공 신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재 위:1400~1418)은 지배기구의 틀을 마련하였 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평의사사 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치적 권한 을 약화시키고, 정치 업무를 6조에서 의정부 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올려 국왕 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는 6조직계제를 채택하였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 시켜 대신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한편, 왕실 외척과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종은 국가 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 려 하였다. 이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으며, 지방 권세가를 통제 하여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줄어들도록 하였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 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문화적으로는 조선 시대 활자의 주조를 담당 하던 관청으로서 1403년 주자소를 설립하였 고, 김사형, 이회 등을 시키어 동양에서 가 장 오래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를 만들었다. ① 조선 성종(1469~1494)은 왕과 신하가 함 께 모여 유학을 논의하고 시책을 나누는 경 연을 활성화시켰으며, 집현전을 계승하여 언 론기관으로서 홍문관을 설치하였다(1478). ② 광해군(1608~1623) 때에 허준 (1539~1615)이 동의보감(1610)을 펴내 전통 의학을 집대성하였다. ③ 세종(1418~1450) 때에 세계 최초로 측우 기를 만들어(1441)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 정하였다. ④ 영조(1724~1776) 때에 국가적 사업으로 홍봉한 등을 시켜 ‘동국문헌비고’(1770)가 편 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의 역대 문물 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사전이다.  - 22 - 정답: ① * 정도전에 대하여 조선 왕조 개창의 1등 공신이며 급진파 사대 부의 대표인 삼봉 정도전(1342~1398)은 고 려 말 공민왕 대에 이색을 중심으로 학문적 유대관계를 통해 교유해온 신진사대부들 중 하나로 신돈의 개혁정치에 참여하여 정치세 력을 형성하고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1383년 신흥 무인세력인 이성계와 만나 제 휴하였고, 이후 이인임 권문세족 정권과 위 화도회군 이후에는 최영 세력을 몰아내고 신 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고 려왕조를 지속하려는 이색, 정몽주 등의 온 건파 사대부들과의 갈등 속에서 그는 조준 등과 함께 과전법(1391)을 주도하고 온건파 들을 제거하고 결국 역성혁명의 입장을 주도 하며 조선 건국에 앞장섰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조 때(1394)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 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 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 때 궁궐 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또한 유교적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기 위한 법전의 편찬에 힘써 조선경국전(1394)과 경 제문감(1395)을 편찬하였고, 민본적 통치 규 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 였고,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의 진리를 논파 하고 배척을 주장한 불씨잡변(1394)을 통하 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 념으로 확립시켰다.   그러나 명과의 갈등(표전문 사건의 당사자) 속에 남은(1354~1398) 등과 요동 정벌을 추 진하며 세자 방석을 후원하다가, 1차 왕자의 난(1398)에서 이방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②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 권람 등이 김종 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며 권력을 장악한 사 건이 계유정난이다(1453) ③ 세종 때(1443)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던 신숙주는 해동제국기를 저 술하여 성종 때(1471)에 간행하였다. 여기에 는 일본국과 유구국(琉球國)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었다. ④, ⑤ 중종 때(1506~1544)에 조광조 (1482~1519)가 중용되면서 일시적으로 천거 제의 일종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또한 그는 방납의 폐단을 줄이 고자 수미법(收米法)을 주장하였는데, 후일 이이, 유성룡 등도 건의하여 1608년에 대동 법이 실시되는 배경이 되었다.  - 23 - 정답: ① * 서원에 대하여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 원이 시초이다(1543). 서원에서는 봄·가을로 향음 주례를 지냈고, 인재를 모아 학문도 가 르쳤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 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고(향사:享祀), 유생 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함으로 써 성리학 연구를 심화시켜 지방 유학자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 주고, 지방 문화의 발 전과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 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며 향촌의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서원은 학문과 교육 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단이 있어 탕평책 을 실시한 영조는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300여 개). 또한 서원은 선현에 대한 봉사와 교육을 목 적으로 세워졌지만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누 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제사 비용의 명 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였다. 이러한 폐단 때문에 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을 추구하던 흥선 대원군 사액서원 중 47개소 만 남기고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와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다(1871).       ② 향촌 자치를 위하여 사족(士族) 설치한 기구인 유향는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 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 구로서 좌수, 별감 등이 회의를 주도하였다. ③ 지방의 중등교육 기관인 향교는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설립 되었다. 향교에는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 앙에서 교관인 교수(종6품) 또는 훈도(종9품) 를 파견하였으며, 5∼7결의 학전을 지급하여 그 수세로써 비용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④ 조선 중종 때에 조광조(1482~1519)를 비 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 의 활성화, 반정 공신 중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도교적 행사인 초제 주관 기관)의 폐 지, 향약의 시행,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⑤ 고려.조선의 농민 공동체 조직인 향도는 매향(埋香) 활동을 통해 평안을 기원하는 신 앙적 기반과 동계 조직 같은 공동체 조직의 성격을 모두 띠었다. 즉 주로 상(喪)을 당하 였을 때에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에 서로 돕는 역할을 하였다. 상여를 메는 사람인 상 두꾼도 향도에서 유래하였다.  - 24 - 정답: ② * 임꺽정의 난이 있던 조선 명종 대 (1545~1567)의 역사적 사실 명종(1545~1567, 문정왕후 소생)은 이복형인 인종(1544~1545, 장경왕후 소생)이 1년 만 에 죽자 어린 나이(12세)로 임금이 되었으므 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종의 외척인 대윤(윤원형 일 파)과 인종의 외척인 소윤(윤임 일파)의 갈등 이 원인이 되어, 최대 규모의 사화인 을사사 화(1545)가 발발하였다. 이 때 양편 모두에 사림이 연루되어 큰 희생이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기 간 동안에 승려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 교 양종 부활(1551) 및 도첩제와 승과가 부 활되었다(1552).   그러나 집권 훈척 세력의 권세와 탐욕이 극 도에 달하며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해택지 (海澤地)나 산록(山麓)을 개간하여 땅을 넓혔 다. 특히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권세 와 탐욕에 맞물려 수취제도가 극도로 문란해 지며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 민이 증가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 어 양반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 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 었다(1562년 처형됨).   ① 현종 대(1659~1674)에 효종과 효종비의 국상(國喪)에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 상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기해 (1659), 갑인(1674) 2차례 예송이 전개되었 다. ③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 히던 사림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김종직(1431~1492)과 그 문인이 중 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 기 시작하였다. ④ 붕당 정치는 선조 이후로 중앙정계를 장 악한 사림 내부의 분열과정이다. 선조 8년 (1575) 이조 전랑을 놓고 김효원과 심의겸 세력 간의 동.서 분당이 시초이다. ⑤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 윤씨 사건을 둘러 싸고 궁중파(임사홍, 신수근)가 성종의 유지 를 주장해 폐비복위를 반대한 잔존 사림(윤 필상, 김굉필, 정여창)과 훈구파 중 부중파 (한명회, 정창손) 등을 처형한 사건이 갑자사 화이다(1498)  - 25 - 정답: ③ * 5군영 시초 훈련도감 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 군은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 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임진 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 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 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 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1593).   훈련도감의 군병은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 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 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 이었다(장번급료병). 한편, 17세기에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해 왔다. 1628년 표류한 벨테 브레이는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서양식 대포 의 제조법과 조종법을 가르쳐 주며 박연이라 는 이름을 얻고 한국인 부인을 얻어 정착하 였으나, 1653년에 표류한 하멜 일행은 훈련 도감에서 총포 기술을 전수하던 중 탈출에 성공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 (1668)를 지어 조선의 사정을 서양에 전하였 다. ① 고려의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 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 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② 고려 시대의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 는 세습되는 토지로서 그 대상은 2군 6위의 중앙군이었다. ④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서리, 잡학 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고, 후기에는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 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 에 동원되는 속오군이 있었다. ⑤ 조선 후기에 정조(1776~1800)는 친위 부 대인 장용영(1793, 도성에 내영, 화성에 외 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 26 - 정답: ④ * 강홍립의 투항(1619) 이후의 역사적 사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재위: 1608~1623) 은 전쟁의 뒷수습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토지 대장과 호적을 새로 만들어 국가 재정 수입을 늘렸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 업을 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공물을 현물 대신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 는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 였다(1608).   또,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 시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고, 전란 중에 질병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 험을 되살려,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 (1610)을 편찬하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 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명 의 요청으로 후금을 토벌키 위해 심하(深河) 에 강홍립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적당히 싸 우다 항복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다(1619).     그러나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 폐시키는(폐모살제)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 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 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 반정 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 게 되었다(1623). ① 조선 세종 때에 4군(최윤덕, 1433)과 6진 (김종서, 1449)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 정하였다. ② 임진왜란 때에 명의 원군이 도착하고, 평 양성에서 조.명 연합군은 크게 승리하였다 (1593.1.6) ③ 선조 때(1589)의 기축옥사(정여립 모반 사건 관련 동인에 대한 옥사)로 서인이 일시 집권하였다. ⑤ 조선 세종 때에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1443, 계해약조: 세견선 50척, 세사미 200 석 이내).  - 27 - 정답: ⑤ * 정조의 정책 부친 사도세자가 참혹하게 죽은 임오화변 (1762)을 통해 붕당정치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낀 정조(1776~1800)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 평책(준론 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 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 여, 규장각(1776)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 성하였고 서얼 출신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 공 등을 검서관으로 삼았고, 37세 이하의 참 상.참하의 당하관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의 정부에서 초선하여 규장각에 재교육(40세에 해제)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법전으로는 대전통편(1785)을 편찬하였다.   한편, 친위 부대인 장용영(1793)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본래 양주 배봉산에 묻혀 있던 아 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지금의 화성군 화산으 로 옮기고(현륭원) 화성을 세워(1794~1796)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 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 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신해통공(1791)의 실시로 육의 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여 자 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① 고종(1863~1907)의 광무개혁 때에 양전 사업(1898)을 실시하여 토지 소유 문건인 지 계를 발급하였다(1901). ② 경국대전이 이후의 법령 중 영구히 시행 할 필요가 있는 법령만을 골라 별도로 영조 (1724~1776) 때에 속대전(1746)을 편찬하였 다. ③ 조선 숙종(1674~1720) 때에 만주 간도 지역을 놓고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 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 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 웠다(1712). ④ 흥선 대원군의 집권기(1863~1873)에 비 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국 기무)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 28 - 정답: ②   * 잠채가 성행하던 조선 후기 경제 상황   조선 후기에는 수리 시설이 확충되며 모내기 법(이앙법)이 널리 확대되었다. 농민들은 모 내기법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의 이모작으로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증가시켜 소득을 증대 하였다(광작).    또한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물을 재 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시가 점 차 증가하여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전 국에 1000여 개소가 개설되었다. 여기에는 보부상들이 장시를 돌아다니며 활동하였다.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에 따라, 농민은 쌀 이외에도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의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팔았다. 또한 17세기 이후로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왜관 개 시와 후시를 통한 대일 무역이 활발하게 이 루어지며, 해외 원산지 작물인 담배, 고추, 고구마, 감자, 토마토 등이 전래되었다.   18세기 이후 송상, 경강 상인 등의 사상(私 商)들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 동을 벌였다. 송상은 송방이라는 지점을 설 치하고 인삼을 재배·판매하였으며, 대외무역 에도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의주의 만 상은 대청 무역을 주도하면서 재화를 많이 축적하였다. 경강 상인은 한강을 무대로 운 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교환의 매개로 서 금속 화폐, 즉 동전이 자연스럽게 전국적 으로 유통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숙종 때에 허적 등의 건의로 주조된 상 평통보(1678)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어 누구나 상평통보만 가지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광업에서는 상업 자본이 채굴과 제련이 쉬운 사금 채굴에 몰리면서 금광의 개발도 활발해 졌다. 광산의 개발은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경우가 있었지만, 몰래 채굴하는 경우도 성행하였다(잠채).     ② 성종 때 문신 강희맹은 네 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대한 필요사항을 기술한 농서인 금 양잡록(1492)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당시 경기도 금양(시흥) 일대의 농업 사정을 살피 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29 -   정답: ④ * 홍대용이 활약하던 조선 후기 문화 동향 -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과학 연구에 힘써(사설 천문대, 혼천의 제작) <의 산문답>을 저술하여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 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 조선 후기의 문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 현하여 양반의 위선적인 모습을 비판하고 사 회의 부정과 비리를 풍자하고 고발하는 경향 을 띠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최초: 홍길동전)의 보급은 그 영향력이 대단히 컸다. 한글 소설은 영웅이 아닌 평범 한 인물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대부분 현실적인 세계가 배경이 되었다. 격식에 구 애됨이 없이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설시조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현실에 대한 비판을 거리낌없이 표현하였다.   ①, ②, ③ 조선 전기에 안견의 ‘몽유도원 도’(1447), 김시습(1435~1493)이 지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음악 서인 성현의 ‘악학궤범’ 등이 만들어졌다. ⑤ 고려 후기에는 강하면서도 유연한 송설체 (조맹부체)가 유행했는데, 이암이 뛰어났다.     - 30 - 정답: ④ * 홍경래의 난(1811)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 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 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등이 평안도에서 일으킨 농민 봉기였다(1811).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 휘 하에 우군칙, 홍총각 등이 주도하며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 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방 랑시인 김병연의 조부인 부사 김익순 투항) ,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 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진압되었다 5개 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 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 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 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 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농민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①, ⑤ 세도정치기의 최대 농민 봉기인 임술 농민봉기(1862) 중 하나인 진주민란은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 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