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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 2024년도 공군 주관 일반군무원 채용시험 시행계획 공고

 

한능검 41회 고급 정답(2018-11-02 / 21.7KB / 10,338회)

 

한능검 41회 고급 문제(2018-11-02 / 4.09MB / 12,490회)

 

한능검 41회 고급 해설 백준기 (2018-11-16 / 1.98MB / 18,615회)

 

  - 1 - 정답: ④ * 청동기 시대의 생활모습 청동기 시대의 농업은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지만,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고 생산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인구가 늘고 잉여 생 산물이 생기자, 힘이 강한 자가 이것을 개인 적으로 소유하였다. 생산물의 분배와 사유화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빈부 의 격차와 계급의 분화를 촉진하였으며 국가 의 성립까지 이어졌다(군장국가). 이러한 계 급의 분화는 죽은 뒤에까지도 영향을 끼쳐 무덤의 크기와 껴묻거리의 내용에 반영되었 고,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인 고 인돌은 많은 인원을 동원시킬 수 있는 계급 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곡식의 이삭 을 자르는데 사용된 반달 돌칼, 바퀴날 도 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형 동검, 의식 용으로 사용된 거친무늬 청동 거울 등의 청 동기, 그리고 미송리식 토기(고조선과 관련 된 유물), 민무늬 토기(대표 토기), 붉은 간 토기 등의 토기가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부여 송국리(집터, 돌널무덤과 독무덤 유적, 비파형동검, 송국 리식 민무늬 토기)가 가장 유명하고 그 외에 여주 흔암리(탄화미 발견), 서천 화금리 유적 (탄화미 창고 발견), 울산 검단리(환호형 촌 락터) 등이 유명하다. 청동기인들의 주거 형태는 신석기 시대와 같 은 움집이지만 집터의 형태는 대체로 직사각 형이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① 구석기인들은 이동에 편한 동굴이나 강가 의 막집에서 살았다. ② 생산력이 미약한 구석기~신석기인들은 계 급없는 평등한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③ 철기 시대에 들어서서 경남 사천 늑도의 반량전(진) , 경남 창원 다호리의 오수전(한), 경남 김해 패총의 화천(신) 등의 중국 청동 화폐가 나와서 중국과의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⑤ 신석기인들은 가락바퀴(방추차)로 실을 뽑고, 뼈바늘(골침)로 옷을 지어 입었다.   - 2 - 정답: ② * 위만에 대하여 고조선은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 로 독자적인 문화(비파형동검, 미송리식토기, 북방식 고인돌)를 이룩하면서 발전하였다. BC 3C 경에는 부왕, 준왕 같은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밑에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도 두었다. 또, 요서 지 방을 경계로 하여 연나라와 대립하다가 bc 283년 연의 장수 진개의 공격을 받아 고조 선의 서방 2천리를 상실하면서 영토를 축소 당하여 고조선의 세력은 일시 약화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고조선의 수도가 요하에서 평양으로 이동하였으며, 연의 철기제작 기술 이 도입되었다고 보고 있다. 진.한 교체기인 기원전 2세기경, 서쪽 지방 에서 세력을 키운 유이민 세력인 위만이 왕 검성에 쳐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이 시기에 철기 문화가 확산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진번, 임둔 등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위치한 진의 여러 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 을 얻어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 으로 커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 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 거왕은 막강한 한의 대군을 맞아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 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 3 - 정답: ① * 고구려와 옥저 (가) 고구려: 부여와 마찬가지로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있었으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 관리를 거느렸다. 그리 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 회의를 통 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 다. 또, 고구려에는 혼인을 정한 뒤 신부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 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 가는 제도인 서옥제라는 풍속이 있었다. 그 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 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 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왕과 신하들이 국 동대혈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나) 옥저: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 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 다. 각 읍락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는 고 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 이 달랐고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 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 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 의 매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 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② 동예는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 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 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 게 하였다. ③ 부여와 고구려는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하게 하였다(1책12법). ④ 삼한 중 변한과 이를 계승한 가야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왜와 한군현에 수출을 하였 다. ⑤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라는 별읍이 있어, 죄 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 가지 못하였다(제정분리).   - 4 - 정답: ① * 대가야의 문화유산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대가야는 시조 이진 아시왕으로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가야연맹은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침입으로 큰 타격 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면서(백제도 위축됨)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반면 5세기 이후에는 고령·합천 등 경상도 내륙 산간지방의 농업에 유리한 입지조건과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하던 소국 반파국 은 5세기 후반에 새로이 시조설화를 만들며 대가야를 표방하며 합천·거창·함양·산청·아영· 하동·사천 등지를 포괄하는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국제사회에도 등장하였다. 479년에 가야왕 하지(荷知)의 이름으로 남제 (南齊)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고, 481년 에는 백제·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침입하 였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진행 된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가야는 백 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활동의 폭이 매우 제한되었다. 554년 백제와 연합하여 신 라를 공격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오히려 562 년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삼국보다 발전하지 못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 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수준을 보유하였 다. 또한 지산동 고분을 비롯하여 본관동·중 화동·양전동·종암동·쾌빈동 등 고령지역에 분 포한 유적지에서 출토되는 금동관, 판갑옷과 투구 등 많은 유물들은 가야연맹의 맹주인 대가야의 발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①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대가야) ② 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288호): 충남 부 여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 목탑 자리에서 출 토. 사리를 보관한 이 사리감에는 20자의 글 자가 새겨져 있어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 양자가 분명하고 사찰의 창건 연대가 백제 때인 567년(위덕왕 14)으로 밝혀졌다. ③ 천마총 천마도(국보 207호): 벽화가 아닌 말의 배가리개에 그린 그림으로 신라의 힘찬 화풍을 잘 보여 주고 있다. ④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국보 119호):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불상. ⑤ 정혜공주묘 출토 돌사자 석상: 중국 길림 돈화현에 소재한 발해 문왕 2째 딸의 무덤에 서 출토. 힘찬 고구려의 기상이 보인다.   - 5 - 정답: ④ * 고구려 발전의 연대기(371~475) 태조왕(53~146) 때에 고구려는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물자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동)옥저를 정복하였고(56), 요동으로도 진출 을 꾀하여 선비족과 함께 요동 태수 채풍을 죽이기도 하였다(121). 고구려는 2세기 후반 고국천왕(179~197) 때 에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었으며, 국상 을 파소의 건의로 진대법(194)을 실시하여 빈민 을 구제하였다. 동천왕(227~248) 때에는 요 동을 놓고 위나라와 갈등하며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으로 인한 수도가 함락되는 위 기도 있었다(244~245).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중원의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300~331) 때에 마지막 한 (漢) 군현인 낙랑군(313), 대방군(314)을 완 전히 몰아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 련하였다. 그러나 4세기 중.후반 고국원왕(331~371) 때 에 서북쪽의 전연 모용황의 수도 침략(342) 과 남쪽의 백제 근초고왕의 침략을 받아 평 양성에서 국왕이 전사(371)하는 국가적 위기 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소수림왕 (371~384)은 중국 북조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을 설립(372)하여 인재를 길 렀으며. 율령을 반포(373)하여 국가조직을 정비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중앙 집권 체 제를 더욱 강화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소수림왕 때의 내정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391~412)은 백제를 굴복시켜 한강 이북 의 지역을 점령하고, 서북쪽의 거란과 선비 족의 후연을 격파하고 동부여와 동쪽의 말갈 을 굴복시켜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 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백제가 왜를 끌 어들여 신라에 침입해오자, 신라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5만을 보내어 왜를 격 퇴하였다(400). 장수왕(413~491)은 414년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여 부왕의 업적을 기리고 평양천도 (427)와 남진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개 로왕(부여경)의 백제 수도 한성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475),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②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 부를 설치하였다(668) ③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유기가 편찬되었 으며, 영양왕(590~618) 때 이문진이 이를 간 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 6 - 정답: ③ * 부여의 백제 문화유산 (가) 부소산성: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를 수호하는 중심 산성으로 주위의 보조 산성인 청산성·청마산성과 함께 도성을 방어하는 구 실을 했으며, 평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 다운 경관을 즐기는 비원으로 활용했을 것으 로 보인다. (나) 관북리 유적: 왕궁지가 있는 곳으로 동 서 25m, 폭 9∼10m의 교차하는 도로가 있 다. ‘前部’銘의 표석이 출토되어 백제 수도 오방제와 관련된 條坊制 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공방시설이 있어 기와와 도기 등을 왕 실, 관청 등에 공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 정림사지: 국보 9호인 5층 석탑이 소재 하고 있다. 이 탑은 미륵사지 석탑(국보 11 호)과 함께 7세기 백제 시대의 대표적 석탑 이다. 백제를 정벌한 당의 소정방에 의해 속 칭 평제탑이라고 불리는 수모를 당하였지만, 목조탑 형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목 조건물의 모습이 한층 간결해져 우리나라 석 탑 양식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라) 궁남지: 무왕이 건설한 별궁 연못으로 서, 궁남지의 조경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 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 (마) 능산리 고분군: 1호분에서 사신도 벽화 가 발견되었고, 2호분은 성왕의 무덤으로 추 정되고 있다. 또한 백제 금동 대향로가 부여 능산리 고분군 사이 절터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고, 능산리 절터에서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되 었다. ① 부여 백마강 변의 호암사지에 재상을 선 출하던 천정대(정사암)가 있다. ④ 경주 월성에 소재한 안압지(월지)는 신라 별궁(동궁)의 연못으로 통일신라의 뛰어난 조경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안압지의 연못, 인공섬, 구릉과 건물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 울리도록 꾸며졌으며 큰 연회가 열렸다. 특 히 안압지 출토 14면 주사위(酒令具)는8세기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며 당시 상류층의 음주 놀이 문화를 알 수 있다. ⑤ 공주의 송산리 7호분이 이른바 무령왕 부 부의 무덤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출토되었다.   - 7 - 정답: ④ *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에 대하여 금관가야 왕족 출신의 장군 김유신(595~673) 은 화랑으로 유명하며(용화향도 통솔) 나당 동맹을 체결하며 외교를 이끈 김춘추(무열 왕)와 함께 삼국 통일의 주역이었다. 647년 선덕여왕 임종 직전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며 상대등 비담 등 귀족 세력 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고, 654년 진덕여왕이 죽으며 상대등 알천이 왕으로 추 대되었으나 알천이 나이와 능력없음을 이유 로 김유신과 연계된 김춘추(무열왕)에게 왕 위를 양보케 할 정도로 군부와 신귀족의 리 더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신라군 뿐만 아니라 많은 화랑을 이끌 고 삼국통일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백제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맞서 반굴, 관창 등의 화랑을 이끌고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이 유명하다. ①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은 나당 전쟁 중 석문 전투(672)에서 비장으로 참여하였으 나 패배하였고, 장수들이 죽었음에도 아들이 살아오자 부모의 진노를 사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김유신 사후(死後) 매소성 전투 (675)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납 받지 못함을 한탄하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 ②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은 진흥왕 때에 관 산성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554) ⑤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는 백제 멸망(660) 후 밈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어 소 정방의 당군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내분으 로 주류성에서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도침 을 부여풍이 죽이는 내분을 보이자 당에 투 항하였다(663).   - 8 - 정답: ① * 발해 무왕 대의 역사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 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고 왕, 698~719)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 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연호:천통). 2대 무왕(719~737, 대무예, 연호:인안) 때에 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 를 강화하였고, 흑수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 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로 하 여금 흑수 말갈을 공격케 하였으나, 대문예 는 이를 거부하고 당으로 망명하며 양국 관 계는 파탄이 았다. 무왕은 먼저 장문휴의 수 군으로 당의 산둥 등주 지방을 공격하는 한 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 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 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결국 발해는 돌궐, 일본 등 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3대 문왕(737~793, 대흠무, 연호:대흥. 보력) 때에는 대내적으로 관료조직이 확충되 고(3성 6부) 왕권이 강화되자, 이를 바탕으로 황제를 뜻하는 황상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 으며 불교의 전륜성왕의 이념을 채택하기도 하였다.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 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 려 하였다. 당이 안사의 난(755~762)으로 어 지러워진 틈을 타서 영토를 넓히고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756), 동경 용 원부(785)로 옮기었다. 이는 송화강 하류의 철리부 등의 동북방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켜 배후지의 안전은 확보되며 지배 체제의 정비 를 반영한 것이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10대 선왕(818~830, 대인수, 연호:건흥)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 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 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5경 15부 62주). 이 때의 전성기를 맞은 발 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 나 10세기 초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에 서 압박해오고, 발해 내부 귀족들의 권력투 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 고, 결국 거란 야율아보기의 침략을 받아 15 대 애왕(대인선) 대에 멸망하였다(926). ④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기(기병).신보(보병).항마(승병)군으로 구성 된 별무반(1104)을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⑤ 고구려 영류왕 때에 천리장성 수축을 주 관하던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자신을 제 거하려는 영류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을 제거 하였다(642).   - 9 - 정답: ⑤ * 의상(625~702)에 대하여 신라 진골 출신의 의상(625~702)은 당에 유 학하여 지엄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화엄종을 창설하고 중국과 다른 독특 한 화엄사상을 전개하였다(해동 화엄종). 즉, ‘화엄일승법계도’를 통해 ‘일즉다 다즉일(一 卽多 多卽一)’의 원융사상으로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여 통일 직후 신라사회를 통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의상은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 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낙산사,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여 불교 문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또한 현세에서 고난을 구 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었다 ① 선덕여왕 때에 당에서 귀국한 자장 율사 가 주변 9개 민족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하 여, 백제 장인 아비지를 초빙하여 지어졌다 (643~645), ② 원효(617~686)는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 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 중화의 길을 열었다. 광대들이 큰 박을 가지 고 노는 것을 보고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부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나무아미타불만 외쳐도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 정토 신앙)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였다. ③ 고려 광종 때 균여(923~973)는 보현십원 가라는 향가를 지어 불교와 세속간의 경계를 없애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④ 통일신라기 혜초(704~787)는 자신이 돌아 본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 10 - 정답: ④ * 김헌창의 난(822) ~ 원종·애노의 난(889) 사이의 역사적 사실(신라 하대) (가) 헌덕왕(809~826) 때에 아버지 김주원(무 열왕계)이 김경신(원성왕계)에게 왕위쟁탈전 에 패하자, 그 아들인 웅주(공주) 도독 김헌 창이 반란을 일으켜(825) 국호를 장안, 연호 를 경운으로 하였고, 뒤이어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이 (북)한산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825), 모두 실패하였다. (나) 신라 말 진성 여왕(887~897) 때에 중앙 정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지방의 조 세 납부 거부로 국가 재정도 바닥이 드러나 자 한층 더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하였다. 이제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다. 상주에 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889)을 시작으 로 농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① 진흥왕(540~576)은 자랑스런 역사를 후대 에 알리기 위하여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 거 칠부를 시켜 역사서인 국사(545)를 편찬케 하였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②, ⑤ 통일 후 신라 신문왕(681~692)은 김 흠돌의 모역 사건(681)을 계기로 귀족 세력 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으 며,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687)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689)하 기도 하였다. ③ 법흥왕(514~540)은 상대등, 병부의 설치 (531), 율령의 반포(520),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④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828) 해적을 소탕하며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 을 장악하고, 왕권 다툼에 간여하여 신무왕 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 였다(839). 문성왕 때에 자기 딸을 왕비로 삼으려다가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진골 귀족 들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846).   - 11 - 정답: ③ * 고려 건국의 연대기 상주 출신의의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 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 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신라 왕족의 후예인 궁예는 처음에는 북원 (원주) 지방의 양길 휘하의 도적 집단에서 성장하여 세력이 커지자 독립하여 송악(개 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 진로 바꾸었다가(904), 다시 태봉으로 바꾸 며(911) 황제국의 면모와 새로운 정치를 추 구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 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 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 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918). 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 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 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워,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 하자 신라를 돕다 927년 공산(대구) 전투에 서 패배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을 막아 냄으로 써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 합할 수 있었다(935). 930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후백제를 크게 격파하여 승기를 잡고, 후백제에 내분(견훤 의 아들 신검이 배다른 형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이 일어나 견훤이 귀 순하자, 후백제를 정벌(일리천 전투)하여 후 삼국을 통일하였다(936).   - 12 - 정답: ④ * 고려 성종의 업적 고려 성종(981~997)은 최승로의 시무 28조 건의를 수용하여 유교 중심, 중앙집권적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12목에 지방관을 파견(983)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 국자 감을 정비(사서에는 992년 성종 때에 창설되 었으나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보는 거의 통설)하고, 지방 12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 였다(987).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 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으 며,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도 새로 마련하였다. ① 고려 예종(1105~1122) 때에는 국자감을 재정비하여 전문 강좌(7재)를 설치하고, 장학 재단(양현고)을 두어 관학의 경제 기반을 강 화하였다. ② 고려 광종(949~975) 대에 양인으로 노비 된 자를 조사하여 풀어주는 노비안검법을 시 행하였다(956) ③ 고려 공민왕(1351~1374)은 신돈으로 하 여금 전민변정도감을 설치케 하고(1366), 권 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 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 시켰다. ⑤ 고려를 세운 태조(918~943) 왕건은 ‘정 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 13 - 정답: ④ * 무신정권기 농민들의 봉기 무신정변으로 고려 전기의 신분 제도가 동요 되어 하층민에서 권력층이 된 자가 많았다. 한편, 무신들 간의 대립과 지배 체제의 붕괴 로 백성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무 신들의 농장 확대로 인하여 수탈이 강화되었 다.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은 종래 의 소극적 저항에서 벗어나 대규모의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무신정변(1170)이 발발하여 의종이 폐위되고 무신들에 의해 즉위한 명종은 실권없이 지내 자, 문신 출신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은 정중 부, 이의방 정권을 타도하고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고자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1173). 서경 유수 조위총 역시 무신정변 이 후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중부·이의방을 타도하여 나라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거 병했으나 역시 실패하였다(1174~1176, 1179 년 재봉기). 이 때에 많은 농민이 가세하였 으며, 난이 진압된 뒤에도 농민 항쟁이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 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 로 봉기하였다(1176).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 였다. 주현군의 병사인 죽동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관노 및 지역의 주민이 가세해 일어 나 항쟁한 전주 관노의 난(1182)이 있었고, 경주 주변 지역인 운문(청도), 초전(울산)에서 는 김사미와 효심이 신라 부흥 운동을 부르 짖으며 봉기하였다(1193). 봉기를 일으킨 이들은 지방관의 탐학을 국가 에 호소하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신 라 부흥 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1217, 최광 수의 난), 백제 부흥운동(1237, 이연년 형제 의 난) 같이 왕조 질서를 부정하기도 하였 다.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회유와 탄압 으로 약간 수그러들었다가 만적 등 천민의 신분 해방 운동이 다시 발생하였다. 최충헌 의 사노비인 만적은 사람이면 누구나 공경대 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노비들을 모아 반란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1198).   - 14 - 정답: ① * 고려의 거란과의 항쟁 916년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후 초기에는 고려와 우호 관계를 위하여 태조 대에 낙타를 선물하였으 나 태조는 동족 국가인 발해를 멸망시킨 거 란에 대한 적개심으로 낙타를 만부교 다리에 묶어 굶겨 죽여 거란을 자극하였다(942). 또한 정종(945~949) 대에는 거란에 포로가 되었다 재능을 인정받아 관리로 발탁된 최광 윤이 사신 편으로 거란의 침략성을 알려 왕 에게 전달하여,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 한 광군 30만이 조직하였다(947). 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 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 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소손녕 과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 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 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94). 거란은 강조의 정변(1009)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삼아 2차 침입(1010)을 하였고,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가기도 하였 다. 국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거란군은 철병 하였다. 이 때 양규는 흥화진(의주)에서 거란 20만 대군에 맞서 싸워 돌아가게 만들었고, 철병하는 거란군을 급습하여 귀주에서 7전 전승을 거두며 3만명이 넘는 백성을 구하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고려는 입조와 강동6주 반환에 응하지 않자 거란은 소배압을 시키어 3차 침입을 하 였다(1018).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맞서 싸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 승을 거두었다(귀주 대첩, 1019). ② 고려 말 최무선은 끈질긴 노력으로 중국 의 화약 제조법을 터득하였다. 이에, 고려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1377) 최무선을 중심으 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최무선은 이 화포를 이용하여 나세 등과 함께 진포(금강 어구)에서 왜선 500척 격멸하였다(1380). ③ 세조 때에 여진의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각 도에 한두 개의 병영을 두어 병사가 관할 지역 군대를 장악하고, 병영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이 그 지역 군 대를 통제하는 진관 체제를 실시하였다 (1457) ④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 양성을 위해 상비군인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1593). ⑤ 고려 무신정권기 최우(1219~1249)는 기 존의 도방 외에, 야별초에서 분리된 좌별초 와 우별초 및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 아온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 별초라는 사병을 새로 두었다.   - 15 - 정답: ① * 의천(1055~1101)에 대하여 문종의 왕자로서 승려가 된 의천은 원효의 통합 불교 사상(일심, 화쟁)을 계승하여 교단 통합 운동을 펼쳤다. 그는 일찍이 송나라에 유학하여 화엄학과 천태학을 공부하고 귀국 하였다. 이후 흥왕사(개경)를 근거지로 삼아 화엄종 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려 하였으며, 또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국청사(개경)를 창 건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사상적 바탕으로 의천은 이론의 연마와 실천 을 아울러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창하였다. 또한 의천은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고려는 물론이고 송, 요, 일본 등의 대장 경에 대한 주석서를 모아 교장(흔히들 속장 경이라 함)을 편찬하였다. 이를 위하여 목록 인 신편제종교장총록을 만들고, 교장도감 (1086)을 설치하여 10여년에 걸쳐 신라인의 저술을 포함한 4700여 권의 전적을 간행하 였다(1091~1101). 개인적 저술로는 현존하지 않는 ‘천태사교 의’ 주(註)와 낙장본으로 일부 존재하는 ‘(신 집)원종문류’, ‘석원사림’ 등이 있다. ② 지눌과 비슷한 시기에 요세(1163~1245) 는 백성의 신앙적 욕구를 고려하여 강진 만 덕사(백련사)에서 자신의 행동을 진정으로 참회하는 법화 신앙에 중점을 둔 천태종 신 앙결사체인 백련결사를 조직하였다(1216). ③ 무신정권기 혼탁한 불교계를 정화시키고 자 지눌(1158~1210)은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독경과 선(禪) 수행, 노동에 고루 힘 쓰자는 개혁 운동인 정혜사(->수선사)를 결 성하였다. ④ 지눌의 제자인 혜심(1178~1234)은 유불 일치설을 주장하며 심성의 도야를 강조하여 장차 성리학을 수용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 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⑤ 고려 후기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1215)은 삼국 시대 이래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 16 - 정답: ④ * 고려의 과거제도와 음서제도 고려의 관리는 크게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고려 광종 때에 중국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 건의에 의해 실시된 과거 제도(958)는 문과인 제술업, 명경업과 잡과로 나뉜다. 제술업(진사과)은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업(생원과)은 유교 경전에 대 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명경, 제술업은 초기에는 중앙관리의 자제인 국자감생과 지방출신인 향공이 직접 본과거 에 응할 수 있었으나, 점차 규정이 정비되어 중기에는 예비시험인 국자감시(국자감 입학 시험)를 거쳐 본시험인 예부시를 치르도록 법제화 되었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따라서 지방 향리의 자제가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주요 통로가 되어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잡업은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고, 무과는 예종 때 무학재(1109)가, 공양왕(1390) 때 무과가 설 치되었으나 사실상 의미는 없었다. 승과는 교종선과 선종선 양과가 있어 합격자는 승계 와 토지를 받았다. 고려는 과거 제도 외에도 공신(공음)과 종실 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문음)의 자손 (아들, 내.외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들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 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 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 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음서는 주로 새 국왕의 즉위나 복위, 왕과 왕태후, 세자의 책봉, 기타 다른 국가적 경 사가 있을 때 시행되었고, 음관을 제수받는 연령은 18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15세를 전후하여 관직에 등용되었 고, 10세 미만이 음직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최저 5세도 있음). 또한 음서로서 관리가 된 자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자보다 많았고 관직에 조기에 나갈 수 있으며 한품(限品)의 제한이 없이 누구나 고위 관리로 나아갈 수 있었다 ㉠ 조선의 과거 응시 자격은 천인을 제외하 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 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무과나 잡과는 가능).   - 17 - 정답: ③ * 고려와 몽골과의 교류 관련 문화유산(경천 사지 10층 석탑)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탑인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후기의 탑으로 원의 석탑을 본 떴으며(탑 상륜이 원에서 유행하던 라마불탑 의 수법) 조선 시대 원각사지 10층 석탑으로 이어졌다. 3단으로 된 기단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 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 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1348년(충목 왕 4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 경복궁에 복원하여 세 웠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① 석굴암 본존불(국보 24호): 통일 신라 시 대에 들어와 균형미가 뛰어난 불상 중 하나 로, 석굴암 주실의 중앙에 있는 본존불은 균 형잡힌 모습과 사실적인 조각으로 살아 움직 이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② 경주 괘릉 무사석: 코가 크고 눈이 움푹 들어갔으며 수염이 많아 서역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④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국보 102호): 고 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 북 중원의 정토사 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겼다. 1017년경에 만들어졌으 며, 8각 원당의 기본형을 잃지 않으면서 일 부에는 새로운 기법이 사용되었다. 즉 탑신 이 원구형이 된 것은 다층석탑의 복발형(覆 鉢形)에서 얻은 기발한 의장으로 보인다. ⑤ 곤여만국전도(1602): 명나라 말 서양 선 교사 마테오 리치가 만든 전 세계 5대주를 망라한 세계지도. 중국을 통해 조선 후기에 전해짐으로써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며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 18 - 정답: ② * 은병이 발행되던 고려 시대의 경제상 고려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여 관청과 귀족이 주로 이용하게 하였고, 경시서를 두어 상행위를 감독하였다. 개경, 서경(평양), 동경(경주)등 대도시에는 관청의 수공업장에서 생산한 물 품을 판매하는 서적점, 약점과 술, 차 등을 파는 주점, 다점 등 관영 상점을 두기도 하 였다. 이 밖에도 비정기적인 시장이 있어 도 시 거주민이 일용품을 매매할 수 있었다. 한편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화폐가 발행 되었다. 성종 때에는 철전인 건원중보(996) 를 만들었으며, 숙종(1095~1105) 때에는 삼 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등 동전과 활구 (은병)라는 은전을 만들었으나, 널리 유통되 지 못하였다. 일반적인 거래는 여전히 곡식 이나 삼베(저포)를 사용하였다. ① 조선은 국초 태종 때(1407)부터 왜구와 대마도주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 등에 왜관 을 설치하여 무역을 허용하였다. ③ 조선 시대인 15세기 말 남부 지방에서 개설되기 시작한 장시에서 주로 활동하는 상 인인 보부상들이다. 이들은 장날이 순환하는 것에 따라 장사를 하면서 각 장시들을 연계 하여 하나의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④ 조선 후기에는 광산 개발도 활발해졌는데 광산 경영은 경영 전문가인 덕대가 대개 상 인 물주에게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와 채 굴 노동자, 제련 노동자 등을 고용하여 광물 을 채굴하고 제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⑤ 조선 후기에 국내 상업의 발달과 때를 같 이하여 대외 무역도 점차 활기를 띠었다. 17 세기 중엽부터 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공적으로 허용된 무역 인 개시(중강, 회령, 경원)와 사적인 무역인 후시(중강, 책문, 단속사)가 이루어졌다.   - 19 - 정답: ② * 계미자를 주조시킨 조선 태종의 업적 두 차례(1398, 1400)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 하여 개국공신 세력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재위:1400~1418)은 통치 기구의 틀을 마련하였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평의사사 와 문하부를 없애고 의정부를 두면서 그 정 치적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치 업무를 6조에 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왕에게 올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게 하는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문하부를 혁파할 때 산하의 하급 관료 인 낭사는 분리하여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대 신들을 자유롭게 비판하게 하였다. 한편, 왕실 외척과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태종은 국가 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키고 군사력을 강화하 려 하였다. 이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으며, 지방 권세가를 통제 하여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줄어들도록 하였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 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문화적으로는 조선 시대 활자의 주조를 담당 하던 관청으로서 1403년 주자소를 설립하여 계미자를 주조시켰고, 김사형·이회 등을 시 키어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인 혼일 강리역대국도지도(1402)를 만들었다. ① 광해군(1608~1623)은 임진왜란으로 질병 이 널리 퍼져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을 되살려, 이를 방지하고자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1610)을 편찬하게 하였다. ③ 성종(1469~1494) 대에 조선의 기본 법전 인 경국대전이 완성·반포되어 통치체제가 정 비되었다. ④ 영조(1724~1776)는 자신의 탕평책을 널 리 알리고 붕당정치의 폐해를 경계하고자 성 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다(1742). ⑤ 세종(1418~1450) 때에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하여 칠정산 내·외 편이 만들어졌다. 특히 칠정산 내편은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한양)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한 것이다.   - 20 - 정답: ② * 각 지역 주요 사찰들에 대하여 (가) 청주 흥덕사지: 1372년 경한(백운 화상) 이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법어(法 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 한 내용을 뽑아 엮은 책을, 경한의 입적 후 인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 지심체요절’로 간행하였다. (나) 논산 개태사: 고려의 태조 왕건이 936 년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에게 승리 한 기념으로 세운 거대 사찰. 직경 289cm, 높이 96cm, 둘레 910cm의 대형 솥주걱이 이를 상징한다. (다) 합천 해인사: 신라 말 애장왕 때에 순응 과 이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고려 창건 당시에 주지인 희랑이 도움이 커 보답으로 고려의 국찰이 되었다. 항몽 과정에서 조성 된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강화도 선원사의 장 경판(국보 32호)이 조선 태조에 의해 1398년 이곳 장경판전(국보 52호)으로 이전 보관되 어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고 법보(法寶) 사 찰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라) 군위 인각사: 선덕여왕 때인 643년에 원효가 창건한 사원. 원의 간섭기인 충렬왕 때에 일연이 이 곳에서 삼국유사(1281)를 저 술하였다. (마) 안동 봉정사: 고려 시대에 주심포 양식 (공포가 기둥 위에만 짜여져 있음)이 유행하 였는데, 13세기 이후에 지은 일부 건물이 지 금까지 남아 있다. 이 중 안동 봉정사의 극 락전(국보 15호)은 1363년 중수된 기록이 있 어 13세기 초 건립이 추정되는 우리나라에 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다. ② 보은 법주사 팔상전(국보 55호): 1605년 에 지어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 석가모니의 생애를 8장면으로 묘사 한 불화 소재한 곳이다. 금산사 미륵전(국보 62호, 1635), 화엄사 각황전(1702, 국보 67 호) 등과 공통적으로 규모가 큰 다층 건물 로, 내부는 하나로 통하는 구조로 되어 있 다. 조선 후기의 불교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반 지주층의 경제적 성장을 반영하고 있 다.   - 21 - 정답: ① * 종묘(宗廟)에 대하여 조선의 태조(재위: 1392~1398)는 교통과 국 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1394),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 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 다. 4대문과 4소문을 포함한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가장 먼저 서쪽에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 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을 완공하고, 정 궁인 경복궁(1395)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역 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드 리는 종묘(宗廟)가 완성되었다(1995년 유네 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종묘는 다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셔 제사를 드리는 정전(건물 내부에 모실 신위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옆으로 증축하여 가로로 긴 건물 형태가 됨)과, 주로 추존된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32위의 신주를 모 신 영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 다. ② 성균관이나 사학·향교 등의 관학 기관은 문묘(공자를 모시는 곳) 및 중국·조선의 선철 (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 무(西廡)가 소재한 대성전(大成殿) 영역과 명 륜당(강당) 및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재(東齋: 양반)·서재(西齋:평민)가 있는 명륜당(明倫堂) 영역으로 크게 나누어질 수 있다. ③ 선농단(先農壇): 농경과 관련된 신인 신농 씨와 후직씨에게 임금이 풍년을 기원하며 제 사를 드리는 곳이다. ⑤ 일제는 총독부 청사로 본래 1907년 건립 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계승해 쓰 다가, 1926년 경복궁의 일부를 헐어내고 새 로 지었다. 해방 후 한국정부의 청사(중앙청) 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5년 김영삼 정권 때 에 철거되며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섰다(국 립중앙박물관도 현재 용산으로 이전)   - 22 - 정답: ③ * 임꺽정이 활동하던 명종 대의 역사적 사실 명종(1545~1567)은 이복형인 인종 (1544~1545)이 1년 만에 죽자 어린 나이(12 세)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 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 일파)과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 일파)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최대 규모의 사화인 을사사화(1545)가 발발하였 다. 이 때 양편 모두에 사림이 연루되어 큰 희생이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기 간 동안에 승려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 교 양종 부활(1551) 및 도첩제와 승과가 부 활되었다(1552). 그러나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권세와 탐욕에 맞물려 수취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지 지며 농민 생활이 악화되어 각 지방에서 유 민이 증가하였다. 유민 중 일부는 도적이 되 어 양반과 중앙 정부로 바치는 물품을 빼앗 기도 하였으며, 이들이 도성에까지 출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임꺽정은 대표적인 인물이 었다(1562년 처형됨). ① 효종(1649~1659) 대에 러시아가 흑룡강 쪽으로 청을 침공해 오자, 청은 조선에 원병 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두 차례(1654, 1658)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 를 올리기도 하였다(나선정벌). ② 세종(1418~1450) 대에 최윤덕과 김종서 를 시키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각각 4군 과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우리 영토를 만 들었다. ④ 숙종(1674~1720) 대에 인현왕후의 복위 와 장희빈의 강등과 관련이 있는 갑술환국 (1694)을 통해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노론,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⑤ 선조 대에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김효원 과 심충겸)와 공론을 둘러싸고 사림이 동인 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1575).   - 23 - 정답: ① * 임진왜란의 전개과정(의주파천 이후) 1592년 4월 14일, 정명가도를 내걸고 왜군 이 부산진과 동래성으로 침략해 오자, 첨사 정발과 부사 송상현 등이 힘껏 싸웠으나 막 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쪽으로 쳐 들어왔다. 중앙에서는 선봉으로 순변사 이일 을 보내었으나 상주에서 패퇴하자, 충주에서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며 북상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4.28). 왜군이 한양 근처에 육박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란하였다(4.30~6.22). 왜군은 6월 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북상하여 한반도 전역 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하였다. 조선은 육전에서와 달리 해전에서는 곳곳에 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순신이 이끄 는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5.4), 이어서 거북선과 판옥선을 앞세워 사천, 당 포, 한산도 앞 바다(한산 대첩, 1592.7) 등 여러 곳에서 승리를 거두며 제해권을 장악하 여,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라도 곡창 지대와 황해안을 지킬 수 있었다. 한편,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 도 의령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싸워 이겼고, 김시민은 진 주에서 적군 2만 명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 두었으나 장렬히 전사하였다(1592.10). 수군이 승리를 거두고 의병의 활동이 활발하 게 전개될 무렵, 요청한 명의 원군까지 도착 하여 조선은 왜군에 반격을 가하여 평양성에 서 조.명 연합군은 크게 승리하며 탈환했으 나(1593.1.6), 벽제관에서 일본군은 명군을 대파하여(1593.1.27) 위기에 빠졌다. 다행히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행주 대첩, 1593.2) 위기에서 벗어나 4월 말에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고 (한성 복귀), 경상 도 해안 지방으로 밀려난 왜군은 전열을 가 다듬기 위해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3년간을 끌어 오던 화의 교섭이 실패 하자, 왜군은 다시 공격해 왔다(정유재란, 1597). 임진년과 달리 화의 기간에 조선군도 군비를 잘 갖추고 명군과 협조하여 왜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또, 물러났던 이순 신이 다시 기용되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 였다(1597.9, 12척으로 133척을 물리침). 마침 도요토미가 사망하고 전세도 불리해지 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순 신은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격멸하였으 나,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며 (1598.11.19) 전쟁은 끝이 났다. ③, ④, ⑤ 세종 대에는 왜구에 대한 강경책 으로 이종무를 시키어 이들의 소굴인 쓰시마 섬(대마도)을 토벌하였고(1419), 또한 교역 확대를 요구하는 대마도주의 요구를 받아들 여 3포를 개방(1426)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 서 교역을 허락하였다(1443, 계해약조: 세견 선 50척, 세사미 200석 이내). 그러나 조선 정부의 통제에 반발하여 중종 대에 삼포왜란 이 발발하였다(1510).   - 24 - 정답: ④ * 여전제를 주장한 정약용에 대하여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 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1762~1836)으로, 신유사옥(1801)과 관련되어 18년 간 강진에 서 유배 생활을 하며 지방 행정의 개혁에 대 하여 쓴 ‘목민심서’, 중앙행정의 개혁에 대하 여 쓴 ‘경세유표’, 형법 개혁에 대한 ‘흠흠신 서’ 등으로 대표되는 500여 권의 많은 책을 저술하여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산천 지세를 기준으로 구역을 획정한 마을 단위인 여(呂) 단위로 여장의 지휘 하에 주민들이 공동경작 하여 생산의 1/10세를 국가에 내고 여장의 녹봉을 떼어준 후 나머지를 노동날짜에 따라 나누어주자는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사전(私田) 8결 과 국가가 소유한 공전 1결의 형식을 취하여 제도를 운용하자는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 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서양 과학기술에 많은 관심을 보여 서 양 선교사가 펴낸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 중기를 만들어 수원 화성을 쌓을 때에 사용 되어 공사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비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정조가 수원에 행차 할 때 한강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배다리도 설계하였다. 의학에도 조예가 깊어 마진(홍역)에 대한 연 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역사 지리서로는 ‘아방강역고’를 저술하였다. ①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과 학연구에 힘써 김석문과 함께 의산문답에서 지전설과 지구 구형(球形)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 등을 내놓았는 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고 중국 중 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② 19세기 말 고종 대에 이제마는 동의수세 보원(1894)을 저술하여 사상 의학을 확립하 였다. ③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인 유수원 (1694~1755)은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⑤ 중상적 실학자인 박제가(1750~1805)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 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특히 우물물 비유를 통하여 적절한 소비를 강조하였다.   - 25 - 정답: ③ * 군역의 개혁 균역법(1750)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 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 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 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 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 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 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 는 3필 등으로 달랐다. 군역의 부담이 과중 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군역의 폐단(인징, 족징, 백골징포, 황 구첨정 등)을 시정하려는 구전론(신분에 구 별없이 일정한 연령층의 모든 남녀에게 포. 전 징수), 결포론(토지 단위로 군포 부과), 호포론(가호 단위 부과, 양반에게도 군포 부 과), 유포론(군역에 빠져있는 자를 색출하여 군포 부과) 등의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양역 변통론), 마침내 균역법(군포 감필론)이 시행 되었다(1750).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 담시키고(잉류 지역 제외),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 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 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 은 다시 가중되었다. ㉠ 고종은 대한제국의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지 아문(1898)을 설치하여 양전 사업을 하고, 지계아문(1901)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문건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 조선은 관리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고 국 가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려 말의 사 전 개혁으로 시작된 과전법(1391) 토지 제도 를 운영하였다. 이 법의 주된 토지인 과전은 전.현직 관료에게 지급된 수조권 토지로 경 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다. 원칙적으로는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공신전과 수신전. 휼양전 등 일부 세습화 경향이 나타나며 신 진 관료에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다. 이에 세조는 직전법(1466)을 제정하여 수조 권을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하고 토지 지급액 을 감소시키며 수신전ㆍ휼양전 등을 폐지되 었다   - 26 - 정답: ⑤ * 조선 후기 대일 사절단 통신사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 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 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섬 도주 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 (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 선인 포로 70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곧 이어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동래부의 부산 포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 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 고,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 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 서는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통 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 에는 400~500 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 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뿐만 아 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①, ③ 조선은 명·청으로 매년 정기적·부정기 적으로 사절을 보냈다. 특히 명에는 정기적 으로는 하정사·성절사·천추사·동지사를, 부정 기적으로는 사은사·주청사·진하사·진주사 등 을 사절로 파견하였다. ② 대청 사신(연행사)의 기행일기를 연행록 이라 하고 홍대용, 박지원의 작품이 유명하 다. 좁은 의미의 연행록은 1791년 문인 김정 중이 사행 일원으로 따라가 적은 연행록이 유명하다. ④ 조선 초기 세종 대에 여진 사절단을 대접 하는 곳으로 서울 동대문 인근에 북평관(야 인관)을 설치하여 조공 무역을 허락하였다 (1438).   - 27 - 정답: ⑤ * 언론.감찰 기관 사헌부 고려의 전곡출납과 회계를 담당하는 재정기 관인 삼사와는 달리, 조선 시대의 삼사인 사 헌부(장관 종2품 대사헌, 주로 백관 감찰, 기 강.풍속 정립, 사법권, 경연 담당), 사간원(장 관 정3품 당상관 대사간, 주로 국왕에 대한 간언, 신료에 대한 탄핵, 경연 담당), 홍문관 (장관 정2품 대제학, 집현전을 계승하여 주 로 왕의 자문 및 경연 주관, 경서.사적의 관 리, 문한(文翰)의 처리)은, 관리의 비리를 감 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필 활동을 하면 서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사헌부와 사간원은 양사라 하여 대간을 이루고 서경.간쟁.봉박을 담당하였는데, 서경 이란 5품 이하 관료에 대한 임면과 법령 개 폐시 동의를 얻는 절차이고, 간쟁은 왕께 충 언(간언)을 하는 것이고, 봉박은 국왕의 부당 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절대 권력을 비 판하는 기능으로 인정되었다. 즉,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 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 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 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 인 모습이다. ① 도교 행사인 초제를 주관하는 기관인 소 격서는 조선 중종 대 사림의 중심 인물 조광 조 등의 건의로 한 때 혁파되기도 하였다. ② 승정원은 왕명출납을 맡은 국왕의 비서기 관이었다. ③ 정조는 친위 부대로 장용영(1793, 도성에 내영, 화성에 외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 침하였다.   - 28 - 정답: ② * 남인 윤휴(1617~1680)에 대하여 서경덕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윤휴는 대학, 중 용을 비롯하여 효경, 주례 등의 경전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하였다. 즉 그동안 내려오 던 주자의 주(註)를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적 해석을 부정하고 주자의 주를 탈피하는 성리 학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본래 당색이 분명치 않았으나 현종 때 의 예송에 참여하면서 남인의 거두로 활약하 였다.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 여 북벌을 주장하였고, 이를 위한 남인들의 도체찰부 확대를 서인들이 역모로 모는 경신 환국(1680)이 벌어지며 사형을 당하였다. ① 성종 대 영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 직(1431~1492)이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항우 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 는 글. 마치 세조에 의해 죽은 단종을 빗대 는 듯이 보임)은, 그가 죽은 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1498)의 발단이 되었다. ③ 중농적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 (1622~1673)은 ‘반계수록’을 저술하여 사농 공상 모두에게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 를 재분배하고, 조세와 병역도 조정하자는 균전론을 내세웠다. ④ 중상적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 (1737~1805)은 청에 다녀온 기행문인 <열하 일기>와 <양반전>, <허생전> 등의 한문 소 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⑤ 김육(1580~1658)은 1608년(광해군 원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 된 대동법을 삼남(충청·전라·경상) 지방에까 지 확대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되도록 하였 다.   - 29 - 정답: ⑤ * 홍경래의 난(1811)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1800~1863)에 시달 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서북) 지방 사람들을 중심 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 등이 평안 도에서 일으킨 농민봉기였다(1811). 홍경래 등은 가난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중소 상인, 광부, 품팔이꾼까지 끌어들여 세력을 키웠다. 반군은 가산에서 시작하여 한때 선 천, 정주 등의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을 점령하였으나, 관군과의 정주성 싸움에서 패 하여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 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 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 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 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농민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① 청에 의해 진압된 국내 변란은 임오군란 (1882.5)과 갑신정변(1884.12)이다. ② 세도정치기의 최대 농민 봉기인 임술농민 봉기(1862) 중 하나인 진주민란은 경상 우병 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③ 인조 반정(1623) 과정에서 공이 큰 이괄 2등 공신으로 한 것은 이괄의 난(1624)을 불 러 일으키고 도성이 함락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가기 까지도 하였으나 도원수 장만이 관 군과 의병을 모아 진압하였다. ④ 동학농민운동(1894) 때에 농민군과 정부 는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폐단이 많은 정치 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여, 이후 농민군은 각 지에 자치행정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 혁을 실천해 나갔다.   - 30 - 정답: ⑤ * 조선 후기 사회·경제 상황 - 일성록과 연경을 왕래하는 상인이라는 것 을 통해 조선 후기 상황임을 알 수 있다. - 조선 후기 공예에서는 백자가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되며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회회 청 안료를 사용한 청화백자가 유행하는 가운 데 형태가 다양해지고, 안료도 청화, 철화, 진사 등으로 다채로웠다. - 조선 후기에는 중인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詩社)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문학 활동을 전개하 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고, 역대 시인의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 다. 대표적인 시사로는 천수경 등의 ‘옥계시 사’, 최경흠 등의 ‘직하시사’, 박윤목의 ‘서원 시사’ 등이 있었다. - 조선 후기 농민들은 시장에 팔기 위한 작 물을 재배하여 가계 수입을 증가시켰다. 장 시가 점차 증가하여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짐 에 따라, 농민은 쌀, 목화, 채소, 담배, 인삼, 약초 등을 재배하여 팔았다. - 조선 후기에는 소설이 크게 증가하여 향유 층이 확대되어 점차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때에 소설을 읽어 주고 일정한 보수를 받던 전기수(傳奇叟)가 등장하였다. ⑤ 조선 초기에는 관리의 경제 기반을 보장 하고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려 말의 사전 개혁으로 시작된 과전법 토지 제 도를 운영하였다((1391~1466). 이 법의 주된 토지인 과전은 전.현직 관료에게 지급된 수 조권 토지로 경기 지방의 토지로 지급하였 다.   - 31 - 정답: ① * 병인박해(1866)와 척화비 건립(1871) 사이 의 역사적 사실 흥선 대원군은 처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하 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천주교 선교 사를 통하여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 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흥선 대 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 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 압을 가하였다(병인박해). 이로 인해 9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당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1866년 9월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하 였다(병인양요). 프랑스군은 군함 7척에 수병 600여 명을 승 선시키고 조선을 침략하여 한강을 봉쇄하고, 그 중의 한 부대는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한 뒤 우수한 화력으로 강화읍을 점령하여 외규 장각 등을 불태우고 의궤와 금, 은 등을 약 탈해 갔다. 한성근이 지휘하는 군대는 서울 로 진격하던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 하였고, 양헌수가 거느린 군대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그 결과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군은 모두 퇴각하였다. 병인양요 후 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충남 예산군 덕산 소재)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1868).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 이 더욱 거세어졌다.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 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 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 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잠 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와 평양의 관민은 제너 럴 셔먼 호를 화공으로 불살라버렸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8)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 에 침입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1871.6). 이 때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 성보에서 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 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 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 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 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1871). ② 운요호 사건(1875) ③ 거문도 사건(1885) ④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⑤ 영남만인소(1881)   - 32 - 정답: ③ * 조미수호통상조약(1882.5) 강화도 조약(1876.2) 이후 청은 일본의 독점 적인 조선 침투를 견제하고 국제사회에 청국 의 위신을 높이고자 미국과의 수교를 권고하 였다. 이 권고안을 집약한 책이 1880년 수신 사 김홍집에 의해 도입된 황쭌셴의 <조선책 략>이다. 이 <조선책략>은 ‘친중’, ‘결일’, ‘연미’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책략>은 조선 내에 큰 영향을 미쳐 조 선의 대외정책이 개국정책으로 전환하는 결 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청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미국의 수교를 적극 알선하였다. 조선에서도 미국과 조약을 맺어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인천 제물포에서 서양 국가들 가운데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1882년 5월, 신헌-슈펠트). 이 때 속방조회 문제가 있었는데 조선과 청 의 사대 책봉 관계는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속국이면서 내치외교는 자주 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었다. 미국을 비 롯하여 조선과 수교한 모든 나라가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였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은 양국 중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핍박을 받을 경우 반드시 서로 돕고 분쟁을 원만히 해결하도록 주선한다는 거중 조정 조항(1조),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 세 부과 조항 등 강화도 조약과 달리 우리에 게 유리한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기본 적으로 치외 법권(4조), 등이 포함된 불평 등한 조약이었다. 이후 조선 주재 미국 공사가 파견되자 정부 는 미국에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여 최초의 구미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하였다(1883). ①, 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1876.2)으로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이 개항 되고, 후속 조치로 체결된 동년 8월의 수호 조규 부록과 무역규칙(통상장정)으로 일본화 폐 사용(부록), 양곡의 무제한 유출, 일본 상 품에 대한 무관세 등이 허용되었다. ② 임오군란 직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 장정(1882.9)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명기하였으며 청상인에게 개항장이 아닌 서 울 양화진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 는 권리와 내지 통상권이 허용되었다. ④ 러일전쟁 중 체결된 1차 한일협약 (1904.8)으로 외교 고문으로 친일 미국인 스 티븐스가 부임되었다.   - 33 - 정답: ⑤ *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에 대하여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 에서 시작되었다. 녹두장군이라 불리우는 전 봉준(1854~1895)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 기(고부 봉기)한 이후,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 여 4월 보국안민(나라를 도와 백성을 편안케 한다)과 제폭구민(부패한 관리를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을 내세우며 다시 봉기하였다 (1차 봉기: 무장 기포 -> 백산 봉기). 이후 황토현, 황룡촌에서 정부군에게 승리하 며 승리와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에 의해 청군이 출동하고 톈진조약에 의해 일본군도 출동하자, 6월 정 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화약을 맺고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전주화 약). 이후 농민군은 각지에 자치행정기구인 집강 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7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 서 경복궁을 점령하며 내정을 간섭하자, 농 민군은 10월 다시 봉기(2차 봉기)하여 외세 를 몰아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 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12월 공주 우금 치 전투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① 을사의병(1905~1906)의 의병장으로는 민 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이 유명하다. ②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하나였던 서재필 (1864~1951)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독립문 건설을 주도하였다. ③ 최익현(1833~1906): 위정척사의 상징적 인물로서 강화도 조약(1876)으로 개항을 할 때에 지부복궐(도끼를 지고 엎드림)의 척화 상소를 올리며 반대하였다. ④ 이인영(1867~1909)은 정미의병(1907) 때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양주에서 각지 의병과 연합군을 조직하였지만(13도 창의총대장) 아 버지의 별세로 군사장 허위에게 지휘를 맡기 고 낙향하였으며, 작전은 결국 실패하였다.   - 34 - 정답: ⑤ *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 일찍이 법률관료로 일하던 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무 너져가는 조국의 현실을 걱정하며 보안회 (1904), 헌정연구회(1905), 신민회 등의 애국 계몽운동단체 설립과 실무에 주도적으로 참 여하였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 종)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전 세계 에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특사는 대한제 국에게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 참석조 차 거부되었으며 열강의 외면을 받았고, 이 준은 분사(憤死)하였다. ① 임병찬(1851~1916)이 고종의 밀지를 받 아 1912년 결성한 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국권을 회복한 후 고 종을 복위시키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 해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② 양기탁(1871~1938)은 1904년 2월 영국인 베델과 함께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③ 조만식(1883~1950)은 1920년 8월 평양에 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하여 경제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 을 전개하였다. ④ 헤이그 특사의 일원인 이상설 (1870~1917)은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서전 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일으켰다.   - 35 - 정답: ① * 대한제국 출범(1897.10) 이후의 역사적 사 실 아관 파천(1896.2) 이후 열강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며, 고종을 황제로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 다. 이에 고종은 1년 만에 러시아 공사관에 서 경운궁으로 돌아왔다(1897.2). 환궁 후 고종은 연호를 광무라 고친 후 환구 단을 쌓아 황제 즉위식을 하고 국호를 대한 제국이라 선포하였다(1897.10). 대한제국은 ‘만국공법’에 기초하여 건국된 국가로, 고종 은 국내외에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 국가임 을 분명히 하였다. 1899년 6월에는 원수부를 설치하여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였고, 8월에는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제 가 군대 통수권, 입법권, 행정권 등 모든 권 한을 장악한 전제 군주임을 표방하였다. 대한 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 래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한 제국 은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질 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와 재 정 확충, 상공업 육성에 주력하였다. 원수부 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권을 장악하고 황제 호위 부대를 증강하였으며, 장교 양성을 위 해 무관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 제국은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양지아문 (1898)을 설치하여 양전 사업을 하고, 지계 아문(1901)을 통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 문건 인 지계를 발급하였다. 이와 함께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한 정책도 추진하여 섬유, 운수, 광업, 철도 등의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 사의 설립을 지원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 다. 또한 근대적 과학 기술을 일으키기 위해 의학교, 상공학교, 외국어 학교 등의 관립학 교를 세우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 ㉣ 개항(1876) 이후 개화정책에 따라 기 기창(1883)에서는 서양무기를 제조하였으며, 육영공원(1886)을 세워 헐버트 등의 미국인 교사들을 초빙하여 주로 양반 자제들에게 신 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 36 - 정답: ② *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의 변천 1919년 4월 상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임시헌장에서 의정원(입법부) 규정과 공화정 체제를 명시하였고 이후 임정 헌법의 기본틀이 되었다. 1919년 9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 의 한성정부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통합 대한 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차 개헌으로 의 정원, 국무원, 법원의 3권 분립 체제와 대통 령제를 갖추었다(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러나 임정의 외교 활동이 번번히 좌절되는 가운데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 임통치 요청 문제가 계기가 되어 임시 정부 는 내분에 빠져들었다. 임정의 방향 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1923)가 열렸 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 속에 회의는 결렬되고 많은 인물들이 임정을 떠났다. 1925년, 임정은 미주 지역의 독립 자금을 독 점하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대통령 으로 선출하며 곧 헌법을 고쳐 내각 중심의 국무령제 개헌을 하였다(2차 개헌). 그러나 위상이 약해진 임정의 국무령에 주요 인물들 이 나서지 않았고, 결국 김구가 1926년 말 취임한 후 1927년, 국무령 중심의 집단지도 체제(국무위원제)로 전환하여(3차 개헌) 이동 녕과 함께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한편, 침체기에 빠진 임정에 활기를 불어 넣 기 위해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 하여, 1932년에 이봉창의 도쿄에서 일본 국 왕에게 폭탄을 투척한 의거와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 공원 의거를 이루어내고, 중국 국민 당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일본군이 상해로 침공해오자 임정은 항저우 로 이전하였다. 이후 김구는 김원봉이 주도하는 민족 혁명당 의 임시 정부의 해체 주장에 반대하며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다(1935). 중·일 전쟁(1937)으로 일본군이 항저우로 침 략하자, 임정은 호남성 창사 등을 거쳐 1940 년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사천성 충칭에 정착하였다. 임정의 인사들은 단일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 기 위하여 충칭에 정착하기 직전에 한국 독 립당(조소앙), 한국 국민당(김구), 조선 혁명 당(지청천)을 해체하고 한국 독립당을 새롭 게 결성하고(1940.5), 동년 9월 충칭으로 옮 긴 임정은 미주 지역의 의연금과 중국 국민 당 정부의 지원 하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 고, 동년 10월에는 주석 중심제 헌법을 채택 하였다(4차 개헌: 김구 주석). 임정은 1941년 11월,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을 앞두고 분열된 민족 운동을 하나로 통일 하려는 의지도 담았고, 임정과 라이벌 관계 였던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임정에 참여를 결의하여 1942년 7월에는 조선 의용대의 일 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고, 1944년 4월에 임정은 5차 개헌을 하여 주석.부주석 지도 체제를 취하여, 민혁당의 김규식을 부주석 에, 김원봉은 군무부장으로 임명하여 민족연 합전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 37 - 정답: ④ * 나석주 열사가 활동한 의열단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윤 세주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그들은 끊임없는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 취하려는 목적으로 조선 총독부의 고위 관리 나 친일파 거두 등을 처단하고, 조선 총독부 나 경찰서, 동양 척식 주식 회사 등 식민지 착취 기관을 파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박재혁)를 시 작으로 밀양 경찰서(1920, 최수봉), 종로 경 찰서(1923, 김상옥), 조선 총독부(1921, 김익 상), 도쿄의 일본 왕궁(1924, 김지섭),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나석주, 1926) 등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그 들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동포들에게는 항일 의식과 독립에의 희망을 심어 주었다.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신채호가 작성한 ‘조 선 혁명 선언(1923)’에는 의열단의 행동 강 령과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민중 직접 혁명 을 달성하려는 의열단의 목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1925년부터 의열단은 방향 전환을 모색하였다. 암살이나 파괴만으로는 민족 해 방 운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여 겨, 대원을 황푸군관 학교에 입교시키고, 조 선혁명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2). ① 1920년대 후반 이후 침체기에 빠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김구는 1931 년 한인 애국단을 결성하여 적극적인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 봉창이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 한 사건과(1932.1)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있 었던 윤봉길의 폭탄 투척이었다(1932.4). ② 최초의 애국계몽운동단체 보안회는 일본 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시켰다(1904). ③ 애국계몽운동단체 대한자강회는 고종 황 제 퇴위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해산되었다 (1907). ⑤ 비밀결사 애국계몽운동단체 신민회(1907 년 결성)는, 한일병합 후 데라우치 총독 암 살미수사건과 관련된 안악 사건 날조에 의해 (105인 사건) 해체되고 말았다(1911).   - 38 - 정답: ② *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1903년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된 미주 지역 의 교민들은 학교와 교회 등을 세우고, 샌프 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1910)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한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1914년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 단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하였 다. 한편 미주 교민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 수립되자 가장 큰 재정지원을 하였으며,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큰 보탬이 되었다. ①, ③ 1860년 이후 많은 동포들이 이주해 살고 있던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에서는 1910년 6월과 8월 유인석, 이범윤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 의군과 성명회(聲鳴 會)가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독립운동 기 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조직인 권 업회(勸業會)가 설립되어 독립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고 학교 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군정기관으로 이 상설, 이동휘 등은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 를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준비하였다. ④ 1918년 중국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 단 소속의 김규식은 1919년 2월 파리강화회 의에 참석하여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⑤ 일본으로는 주로 노동자나 유학생들이 건 너갔고, 1919년 윌슨의 ‘민족 자결론’에 고 무된 조선 청년 독립단(최팔용, 백관수 등)은 2·8 독립 선언을 선포하여 국내의 3.1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39 - 정답: ② * 지청천(1888~1957)에 대하여 일본 육사 출신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지청천은 북만주에서 1931년 한국 독립군을 결성하고 중국군과 연합하여 토일군(구국군 또는 호로군)을 조직하였다. 토일군은 쌍성 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전리품 문제와 만주에서 사회주의화 되 어가는 중국군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다 김구의 요청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다. 1937년에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을 때 (1940.9)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해방 후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이끌고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였다. ① 멕시코 한인교포를 이끌던 이근영은 메리 다 지방에 숭무학교를 설립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1910). ③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이자 임정의 군무부 장을 지낸 노백린(1875~1926)은 독립군 비 행사 양성을 위해 1920년 미주 캘리포니아 에서 한인 비행 학교를 세웠다. ④ 김좌진(1889~1930)은 대한광복회, 중광단 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를 이 끌어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었다. ⑤ 여운형(1886~1947)은 1944년 일본의 패 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 조선건국동맹을 조 직하여 건국을 준비하였고, 해방 직후 조선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였다(1945.8).   - 40 - 정답: ③ *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1859~1925) 호는 백암, 태백광노 등. 일찍이 애국계몽운 동의 일환으로 서북학회 활동, 황성신문 주 필 등의 언론 활동을 하였으며, 1909년 양명 학에 토대를 둔 유교 구신론을 발표하여 유 교개혁을 주장하였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915년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결성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1925년 2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곧 서거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개항기 역사 (1863~1910)를 다루며 국혼 사상을 언급한 ‘한국통사(1915)와 1884~1919년의 독립투쟁 의 역사를 다루며 국혼, 국백 사상을 역설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일제 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즉, 그는 일제에 빼앗긴 것은 ‘국백’일 뿐이요, ‘국혼’ 이 살아있으면 광복을 이룰 수 있음을 역설 하였다. ① 랑케의 실증적 사관에 영향을 받은 이병 도(1896~1989)는 1934년 국학 연구 단체인 진단 학회 설립을 주도하고 진단학보를 발간 하며 실증주의 사학을 발달시켰다. ② 조선 ‘얼’을 강조한 정인보(1893~1950)는 문일평,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역 사학들과 함께 1934년 ‘여유당전서’ 간행을 계기로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1880~1936)는 일찍이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1908)을 연재하여 왕조 사관과 사대주의를 비판하면 서 민족 중심의 자주적 역사관 수립의 필요 성을 역설하였다. ⑤ 1930년대에는 백남운(1895~1974)에 의해 사회 경제사학이 대두되었다. 그는 ‘조선사 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에서 마르 크스의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한국사가 세계 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 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 론을 반박하였다.   - 41 - 정답: ③ * 원산 총파업(1929) 이후의 노동운동 1920년대 일본 자본의 유입과 한국인 기업 이 늘어나면서 노동자 수가 증가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과 같은 가 혹한 노동 조건에 시달렸다. 노동자의 반 이 상이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였으며, 영양 실조와 폐결핵 등 각종 산업 재해에 시달렸 다. 또한 임금에 있어서도 한국인은 같은 직 종에 종사하는 일본인의 절반 정도만 받을 정도로 민족 차별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20년 지식인과 노동 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노동 공제회를 결 성하였다. 조선 노동 공제회는 사회주의자들 이 참여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여 조 선 노농 총동맹으로 발전하였다(1924). 이후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7년 조선 노동 총동 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으로 분리되었다. 1920년대 노동 쟁의는 임금 인하 반대와 노 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 투쟁이 많았 다. 1921년 부산 부두 노동자 파업을 시작으 로 곳곳에서 노동 쟁의가 일어났다. 1926년 목포 제유 공장 노동자 파업, 1927년 영흥 흑연 광산 노동자 파업은 수개월간 전개되었 다. 원산에서는 일찍부터 노동 운동이 발달하였 는데, 1925년에 원산 노동 연합회가 결성되 었다. 이런 가운데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 원군 문평리에 있는 라이징 선 석유회사에 서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 났다. 그러나 노동자의 요구 이행을 약속했 던 문평 제유회사가 1928년 12월 약속을 이 행하지 않자, 원산노련은 1929년 1월 총파 업을 전개하였다. 4개월 동안 지속된 총파업 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후 노동 운동이 일제에 저항하는 반일 운동으로 발전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② 1923년 7월 서울의 경성 고무 공장을 비 롯한 4개 고무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 반대와 악덕 감독의 파면을 요구하며 아사동맹(餓死同盟: 단식투쟁)을 조직하여 동 맹 파업하였다. 이러한 아사동맹 결성 단식 투쟁은 동년 7월의 암태도 소작쟁의에서도 전개되었다. ③ 강주룡(1901~1932)은 1931년 평양 고무 공장 파업 때 을밀대 지붕 위에서 투쟁하였 다. ⑤ 1923년의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소작 쟁 의(암태 소작회 주도)는 한국인 지주(문재철) 와 일본 경찰에 맞서 1년간 싸워 소작료 인 하를 관철시킨 소작쟁의의 대표적 사례이다.   - 42 - 정답: ④ * 조선 의용대 1935년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으로 형성 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민족 혁명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공산주의 정 당과 연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 하고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우한에서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다(1938).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 인 조선 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군대와 함께 선전 활동, 일본군 포로 심문 등을 수행하였 으나, 일부는 중국 국민당의 과도한 통제와 소극적 항일 투쟁에 반발해 김효삼, 윤세주 등의 다수 부대원들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 여 조선 독립 동맹 및 조선의용군을 결성하 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1942).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군(팔로군)의 지원 을 받으며 함께 태항산 전투, 호가장 전투 등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조선 의용대의 대 원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 후 김원봉과 남 은 세력들은 임시정부(군무부장)와 한국 광 복군(1지대장)에 합류하였다(1942). ① 간도참변 이후 소련의 지원을 믿고 제 독 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1920.12, 총재 서일) 을 결성하여 극동 자유시로 들어갔으나, 독 립군 내부의 군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 과정 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는 자유시 참변을 당하며(1921.6),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② 북만주에서 한국 독립당의 산하에 1931 년 결성된 한국 독립군은 지청천의 지휘 아 래 중국군(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③ 남만주에서 결성된 조선 혁명당 산하에 1929년 결성된 조선 혁명군은 양세봉의 지 휘 아래 중국 의용군(요녕민중자위군)과 연 합하여 영릉가 전투와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 군을 크게 물리쳤다. 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대한 국민 회군(안무), 군무도독부(최진동), 신민단 등의 독립군과 연합하여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50여명 사살).   - 43 - 정답: ② * 대종교에 대하여 을사 5적 암살단을 이끌던 나철(1863~1916, 1대 종사), 오기호(1863~1916) 등은 1909년 에 단군 신앙을 받드는 대종교를 창시하였 다. 대종교는 국권 피탈 후 교단을 만주로 옮기 고 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였고, 2대 종사 김교헌(1868~1923)은 3대 종사 서일 (1881~1921)을 단장으로 하여 중광단(1911) 을 결성하였고, 대한독립선언(1918.11)을 주 도하였다. 중광단은 3·1 운동을 전후로 하여 정의단, 군정부를 거쳐 북로 군정서(총재: 서일)로 개 편되어 청산리대첩(1920.10) 등 적극적인 항 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간도참변(1920.10~12) 후에 서일은 북로군정 서, 대한독립군 등 모든 제 독립군 부대를 대한독립군단(1920.12)으로 편성하여 소련 자유시로 넘어갔으나 적군에 의해 무장해제 와 이를 거부하는 독립군들이 참살당하고(자 유시 참변, 1921.6) 토비들의 습격이 겹치 자,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 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 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 으로 자결하였다. ①, 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신문으로 만 세보(1906), 잡지로는 개벽(1920), 신여성 (1923), 어린이(1923), 등을 간행하며 문화.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방정환이 활약한 천도교 소년회에서는 1923년 5월 1일 어린 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라는 잡지를 간행 하였다. ③ 미국 개신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1885)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힘썼 다. ④ 북간도 지역의 천주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무장단체인 의민단(1919)을 조직하여 청 산리 전투 등에 참여하였다.   - 44 - 정답: ② *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 제정(1941) 이후의 역사적 사실 일제는 중일전쟁(1937)의 배경 속에서 1938 년 국가 총동원령를 선포하고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1941)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 히 말살 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 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 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 개명, 1939),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 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또한, 기존의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1936)에 이어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1941)를 공포하 여 한국인 사상범을 사전에 탄압하였다 ①, ④ 1920년대 중반에 비타협적인 민족주 의 세력은 타협론자들의 자치 운동을 경계하 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이를 저지하 려 하였다. 치안유지법(1925)으로 탄압받는 사회주의 세력도 1926년 ‘정우회 선언’을 발 표하여 이에 호응하여 결국, 비타협적 민족 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이념과 노선의 차 이를 뛰어넘어 민족 협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의견을 모아 합법적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되 었다(1927). ② 조선어학회 사건(1942.10): 함흥영생여고 의 한 학생의 한국말 대화를 취조하던 일제 는 한글 연구단체인 조선어 학회를 배후의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장지영, 최현배, 이희승, 이극로 등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 로 해산시켰다. 이 때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 (獄死)하였다. ③ 1926년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조선학 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하 학생들과 사회 주의자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회 주의자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학생 들은 대규모 시위를 진행시켰다(6.10만세운 동). ⑤ 김구의 한인 애국단 소속 윤봉길은 1932 년 4월, 상해 홍구 공원에서의 일본 전승 기 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등 많은 요인들을 살상하여 대한인의 기개를 떨 쳐냈다.   - 45 - 정답: ③ * 이기영과 프로 문학 이기영(1895~1984)은 일제 하 대표적인 프 로 문학(사회주의 문학) 작가로 한설야, 박영 희, 김기진 등과 함께 1925년 카프(KAFE:조 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민 촌’, ‘고향’ 등의 작품을 저술하며, 일제 하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총체성 을 보여주었다. ① 이해조(1869~1927)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 근무하며 익명으로 많은 신소설을 발표 하였다. 대표작 ‘자유종’ 등에서 여권신장, 신교육 등의 개화사상을 고취시켰다. ② 최남선(1890~1957)은 최초의 문학 잡지 인 ‘소년’(1908)을 창간하고 최초의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④ 안국선(1878~1926)은 정치풍자적 신소설 ‘금수회의록’(1908)을 발표하여 동물들을 내 세워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다가 우리나라 최 초의 판매금지 소설이 되기도 하였다. ⑤ 의열단 단원이기도 한 항일저항 시인 이 육사(1904~1944)는 남성다운 스케일로 초인 의 도래를 염원하는 시 ‘광야’가 유명하다.   - 46 - 정답: ② * 위수령이 제정된 이승만 정부(1948~1960) 시기의 역사적 사실 위수령(衛戍令)은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0 년 3월 육군 부대 경비를 위해 대통령령으로 제정돼 군부대가 자기 보호를 위해 외부 침 입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령이다. 또한 재해나 비상사태 시에도 서울시장·광역 시장·도지사 등의 지자체장의 병력 청구시 군부대가 주둔지 밖으로 출동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계엄령과는 다르게 국회의 사후 승인이 필요 없는 위수령은 군사정권 시절 군부대가 집회 나 시위를 진압하는 근거 법령으로 사용돼왔 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5년 8월 한일협 정 비준안 국회 통과 직후와 1971년 10월 교련 반대 시위 때에 서울지역에,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에는 마산·창원 일대에 위 수령이 선포되었다(부산은 계엄령). ①, ③, ④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 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 철 고문 사망 사건과 4·13 호헌 조치(대통령 간선제 고수)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직선제 개헌과 민주 헌법 제정 을 요구하는 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 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 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여 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②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 은 집권 연장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마침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 어나며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⑤ 1980년 전두환, 노태우가 이끄는 신군부 의 5.17 비상계엄 확대가 원인이 되어 발발 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계엄군의 잔혹 한 진압에 맞서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조직되 었고, 결국 수백 명이 희생되며 진압되었다.   - 47 - 정답: ① * 전두환 정부 시기의 역사적 사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고 등장 한 전두환 정부(1980.8~1988.2)는 언론통폐 합(1980년 12월 언론기본법 제정), 정치활동 규제 등 민주화를 억압하면서 해외 여행 자 유화(1981년 여권법 시행령 개정), 야간 통 행금지 해제(1982), 중.고생 두발 및 교복 자 율화(1983), 프로야구 출범(1982) 등의 국민 유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 염원(대통령 직선제)을 무 시하고 1987년 4.13 호헌 조치(대통령 간선 제 고수)를 발표하여 6월 민주 항쟁이 일어 났고, 결국 6.29 민주화 선언(대통령 직선제) 을 수용하며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 ㉣ 박정희 정부는 당시 만연한 허례허식 과 낭비를 없애고자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과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시행령' 을 제정하였고,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국가 주도의 식생활 개선운동인 혼·분식 장려운동 을 1967년부터 시작하여 10여 년간 실시하 였다.   - 48 - 정답: ③ *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로 한 선언들의 연대기 (나) 모스크바 3국외상회의 결정문(1945.12): 모스크바 3국(미・영・소)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 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 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 하였다. (가) 좌우합작 7원칙(1946.10): 이승만을 중 심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론에 맞서 김규식 (중도 우파)과 여운형(중도 좌파) 등은 분열 된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고(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 결성),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의 결정에 따른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공동 위 원회 참가 후 신탁 통치 문제 해결, 유상 매 상과 무상 분배 원칙하의 토지 개혁 등을 주 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 였다(1946.10). (다) 남북 제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 공동선 언서(1948.4):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 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이에 분단 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 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 를 제의하였고, 북한은 제정당 사회 단체 대 표자 연석회의도 요구하여 1948년 4월, 두 회의를 포함한 남북협상이 개최되었다. 연석 회의를 통해서는 외국 군대의 즉각 철수, 외 국 군대 철수 후의 내전이 발발치 않는다는 약속,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단독선 거 부인 등에 합의하였다.   - 49 - 정답: ⑤ * 브라운 각서(1966)를 접수한 박정희 정부 시기의 외교정책 브라운 각서는 1966년 3월, 미국 정부가 한 국군 월남 증파의 선행조건에 대한 양해사항 을 당시의 주한 미국대사 브라운을 통하여 한국 정부에 전달한 공식 통고서문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미 1965년 10월 국군 1개 전투사단을 월남에 파견하였는데, 1966 년 2월 월남 정부가 한국에 병력증파를 요청 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증파에 앞서 한국 안보와 경제발전 등 제반문제의 해결을 위한 조치를 요구하는 선행조건을 미국 정부에 제 시하였다. 그 결과 미국 정부는 14개 조항에 걸친 보 장과 약속을 브라운각서의 형식으로 한국 정 부에 공식 통고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① 한국방위태세의 강화 ② 국군 전반의 실질적 장비현대화 ③ 보충병력의 확충 ④ 증파비 부담 ⑤ 북괴의 남파간첩을 봉쇄하기 위한 지원과 협조 ⑥ 대한군사원조 이관의 중지 ⑦ 미국 국제개발처(AID) 차관 제동⑧ 대월 남 물자 및 용역의 한국조달 ⑨ 장병의 처우 개선문제 등이었다. 이후 베트남 경제 특수와 미국의 차관 제공 은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①, ②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8월, 남 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고,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1992년에는 중국과 수교하였다. ③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 성급하다는 반 대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를 내세우며 경제협 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시장개방 정책을 실시하였다. ④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4월, 칠레와 자유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다. 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려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 였다. 학생과 시민들은 회담 진행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등에서 우리 측이 지나치게 양보한 굴 욕적인 외교라며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 였다(1964년 6·3 시위). 정부는 비상계엄을 실시하여 이를 억제하고 1965년 한·일 협정 을 체결하였다.   - 50 - 정답: ③ *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한 김대중 정부 의 통일노력 김영삼 정권 말의 한보 사태를 계기로 국제 단기 자본이 이탈하면서 생긴 1997년 말의 외환위기(IMF구제금융)를 금모으기 운동 등 의 국민의 자발적 헌신과 산업 구조조정, 노 사정 위원회를 통한 고통 분담 정책 및 신자 유주의 정책으로 조기(2001) 상환할 수 있었 다.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복지정책에도 힘을 써, 기존의 4대 보험 외에 기초생활보 장제도(2000)를 새로 도입하였다. 또한 적극적인 대북포용정책을 펼쳐 금강산 관광 사업(1998)이 시작되며 정부와 민간 차 원의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고, 그 결과 1차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2000)을 이끌 어내며 개성공단 건설, 경의선 연결, 이산가 족상봉 등에 합의하였고, 2002년에는 일본과 월드컵을 공동개최하여 한국의 이름을 드높 였다. ①, ④ 노태우 정부 때에는 1991년 12월, 남북한이 상호 상대방 정권의 실체를 인정하 는 바탕 위에서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 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채택 하였다. ② 박정희 정부 때에 분단 이후 처음으로 자 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합의 한 7·4 남북공동선언(1972)의 후속 조치로 남북조절위원회가 설치되었다(1972.11). ⑤ 전두환 정부 때인 1985년 9월, 남북한의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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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7 제4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해설 19~22번 (하프한국사)
 
4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 해설 11-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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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43회 고급 문제 정답 해설 +8 (2019-05-25) 한국사능력검정시험 42회 고급 문제 정답 해설 +10 (2019-01-26) →한국사능력검정시험 41회 고급 문제 정답 해설 +10 (2018-11-02) 한국사능력검정시험 40회 고급 문제 정답 해설 +25 (2018-08-11) 한국사능력검정시험 39회 고급 문제 정답 해설 +8 (2018-05-26)
댓글수 10
  • profile
    기출이 5년 전

    해설은 아직 7번까지밖에 안올라왔네요~

  • ㅇㅇ
    ㅇㅇ (*.117.15.56) 5년 전

    최근 한능검 문제 중에서 제일 어려운듯

  • 도움
    도움안됨 (*.198.248.91) 5년 전

    블로그내 보기 힘들게 ㅅㄱ

  • profile
    기출이 5년 전
    @도움안됨

    파일로 가져왔어요. 감사합니다~

  • 안락
    안락동보안관 (*.103.70.237) 5년 전

    50번 해설 2,4,번 잘못됨 ㅅㄱ

  • 1년
    1년장수 (*.219.125.163) 5년 전

    33분 89점

  • 빨코
    빨코 (*.195.197.190) 5년 전(수정됨)

    와 장난하나 너무 어렵잖아요. 계속 90점 이상 받다가 61점 받음 ㅋㅋㅋ 참나 난이도 중간이 없네

  • profile
    lay**** (*.87.151.32) 5년 전(수정됨)

    난 어려운거 잘모르겠는데 점수 비슷함

  • 진포
    진포 (*.34.64.58) 4년 전

    조금 난이도가 있기도 하고 처음나오는 자료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생각하며 풀면 충분히 평타이상나오는 문제.

  • 찰나
    찰나 (*.116.10.144) 3년 전

    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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