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사_연구사_A형정답(2021-05-15 / 384.9KB / 141회)
한국건축사(연구사) A책형 1/3쪽 1. 서울 소재 주택 중 평면 형태가 ㄷ자형인 것은? ①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사랑채 ② 안국동 윤보선가 안채 ③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안채 ④ 옥인동 윤씨 가옥 안채 2. 삼국시대의 불교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삼국은 종교를 통해 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장대한 불교사원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② 초기에 중국 건축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건축술을 확립하였다. ③ 7세기경 석탑의 등장은 중국 건축이 동아시아에서 보편성을 확보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고유의 창의성이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④ 일본의 초기 절터인 아스카지(飛鳥寺)와 호류지(法 隆寺)는 한반도의 건축기술이 이전된 사례이다. 3. 조선시대의 궁궐 건축 및 도시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 초기 관료들에게 도시는 상업이 번성하는 소비 장소가 아니라, 유교적 질서가 바로서는 예가 살아 있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② 도성의 성문은 국가적 예제를 실현하는 장소로서 정확히 각 방위에 맞추어 여덟 군데에 설치되었다. ③ 세종은 경복궁을 법궁으로 사용하면서 궁성의 정문을 광화문(光化門)으로, 금천 위의 석교(石橋)를 영제교 (永齊橋)라 명명하였다. ④ 근정전 앞뜰에 품계석을 배치하고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서도록 하였다. 4. 에서 고려시대의 건축물을 모두 고른 것은? ㄱ. 강릉 임영관 삼문(강릉 객사문) ㄴ. 예산 수덕사 대웅전 ㄷ. 영주 부석사 조사당 ㄹ. 연탄 심원사 보광전 ① ㄱ ② ㄷ, ㄹ ③ ㄴ, ㄷ, ㄹ ④ ㄱ, ㄴ, ㄷ, ㄹ 5. 조선시대의 불교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태조는 1397년 신덕왕후 강씨를 위해 흥천사(興天寺) 를 세워서 이곳을 조계선종의 본사가 되게 하였다. ② 유교를 믿어오던 세조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실시하고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③ 16세기에 퇴계 이황 집안은 기제사를 절에서 지냈다. ④ 김제 금산사 미륵전은 드물게 남아 있는 3층 불전 중 하나이다. 6. 조선시대 건축의 목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 초기 지방 관아 건물에는 일반적으로 주심포 형식이 사용되었다. ② 조선 초기 궁전이나 성문 등 국가 시설에는 다포형식 이 주로 사용되었다. ③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기를 지나며 조선의 독창 적인 구조기법인 익공형식이 나타났다. ④ 조선 중기 이후 다포형식의 공포를 구성하는 각 부재의 독립성이 강해지고, 쇠서는 점차 단순해진다. 7. 수원 화성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화성의 입지로 교통의 요지가 아닌 군사적 요충지가 선택되었다. ② 화성 안 중심부에 십자가로를 만들고 주변에는 상점을 위치시켰다. ③ 정약용은 평지에 건설되는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문에 옹성을 두고,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대포를 설치한 포루를 두었다. ④ 서양의 기술서적인 기기도설(寄器圖說)을 참고해 고안한 거중기(擧重器)는 축조의 효율성을 높였다. 8. 건축물 중 용도가 다른 것은? ① 구례 운조루 ② 담양 소쇄원 ③ 영양 서석지 ④ 대전 남간정사 9. 고려시대 도성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① 평양성은 궁궐을 삼중의 성벽으로 감싸고, 황성 정문 에서 가로 중심부인 십자로까지 도로로 연결하고 장랑을 갖추는 등 개경보다 한걸음 나아간 도시 구성을 하였다. ② 개경의 도시 구성은 경주의 도시 구성을 이어 받아 규칙적이고 네모반듯했다. ③ 개경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완만하게 경사진 곳에 대지가 조성되어 궁궐이 건설되었다. ④ 개경의 행정구역을 5부(部) 35방(坊) 344리(里)로 설정하였다. 한국건축사(연구사) A책형 2/3쪽 10. 일제강점기 한국인 건축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박동진(朴東鎭)은 193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였는데, 보성전문학교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하였으며, 건축 전문지 건축조선을 발간하였다. ② 박인준(朴仁俊)은 미국 미네소타대학을 졸업한 유학파로 가회동의 윤치호, 윤치왕, 윤치창 씨 댁을 설계하였다. ③ 박길룡(朴吉龍)은 191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 하고 경성제국대학 본관, 화신백화점, 한청빌딩, 김연수 주택 등을 설계하였다. ④ 강윤(姜鈗)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보리스건축 사무소에서 실무경험을 쌓았으며, 한식과 양식을 절 충한 태화기독교사회관을 설계하였다. 11. 익산 미륵사와 경주 황룡사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두 사찰은 백제와 신라의 고대 왕권이 만든 거대가람 으로, 두 사찰의 탑은 삼국시대 건축의 핵심으로 평가된다. ② 진흥왕에서 선덕왕 사이에 조성된 황룡사 2차 가람 공사에서 9층 목탑이 건축되었다. ③ 미륵사는 세 금당 앞에 각각 탑을 놓은 삼원식(三院式) 가람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④ 두 사찰은 구릉지의 지형과 물길의 조건에 순응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찰 건축이다. 12. 조선시대 양난 이후의 사찰 건축의 변화에 대한 설명 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 후기 사찰들은 대부분 주불전 앞마당이 중심이 되어 전면에 누각이 자리잡고 마당 좌우에 요사채가 놓여 중정형을 이루었다. ② 양난 이후의 승려들은 사찰 복구를 위해 자발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관아나 왕실 관련 건축에는 관여 하지 않았다. ③ 17세기 이후 사찰 내부는 실내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대들보를 위로 올리고, 불상을 실내 뒤편으로 후퇴 시켰다. ④ 사찰 내 ․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주불전을 다포형식으로 하고 창살에는 꽃무늬, 충량(衝樑) 머리 에는 용 장식을 하였다. 13. 조선시대 주택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① 조선시대 주택은 예제의 영향으로 사당을 갖추고, 집 터와 집의 크기 그리고 장식을 규제하였지만 명문화 되지는 않았다. ②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 설치는 고려 말 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조선 초기에는 잘 지켜졌다. ③ 대청마루는 의식 절차를 치르는 장소로 중요성이 높았다. ④ 16세기 초에는 제주도에 온돌이 보급되지 않았다. 14. 서울 소재 건축물 중 「문화재보호법」상 등록문화재는? ① 서울 정동교회 ② 서울 대한의원 ③ 구 서울특별시청사 ④ 서울 경교장 15. 일제강점기 근대 도시와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총독부는 1912년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시구 개정(市區改正) 사업을 벌였는데, 가로 정비를 적극 적으로 실현하였다. ② 탁지부 건축소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의 건축업무를 담당해 조선은행과 총독부청사 등을 지었다. ③ 총독부는 도시 노동자들의 주택 공급을 목표로 한 조선주택영단을 세워, 5종류의 표준설계도를 마련 하였다. ④ 일제강점기 신주택지에 건설된 서양식 외관의 주택을 문화주택이라 한다. 16. ㈎~㈐의 명칭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 ㈏ ㈐ ① 단소로 뜬장혀 도리 ② 단장혀 뜬도리 장혀 ③ 단장혀 장혀 뜬장혀 ④ 단소로 장혀 단도리 한국건축사(연구사) A책형 3/3쪽 17. 한국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건축에 벽돌이 사용되지 않다가, 개항 이후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② 일본은 군산과 목포의 역사(驛舍)에 일본의 목조 양식을, 부산과 신의주 역사에는 서양의 고전양식을 채택하였다. ③ 18세기 이후 관찬읍지가 사찬읍지를 압도하며 발간 되었다. 그중 여지도서가 대표적인데, 동국여지 승람과 항목 및 체제가 현격히 다르고 거리와 방위를 알 수 있는 채색 지도가 첨부되었다. ④ 19세기 후반 재래식의 목조건물은 19세기의 기술 을 바탕으로 이전보다 한층 세련된 공간구성을 갖 추고 기술적으로도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8. 고려시대의 불교와 사찰 건축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신봉되었으나, 왕실의 기복을 비는 원찰은 도성 안 에만 조성되었다. ② 연등회나 팔관회는 종교의례를 넘어 왕과 백성을 잇는 국가의례로 개최되어 사찰은 종교공간인 동시에 정치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③ 혜음원은 개경과 남경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 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지어진 절이며, 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도 축조되었다. ④ 신라시대에 창건된 금산사는 11세기에 중창되었으며, 본원, 광교원, 봉천원의 세 구역으로 구성되고 각 원에는 3층 전각이 지어졌다. 19. 고종의 즉위 후에 이루어진 경복궁 중건에 대한 설명 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경복궁 중건은 서원 철폐와 함께 왕권 회복을 위한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② 중건된 경복궁은 창건 때의 기본 골격을 재현함과 동시에 건물의 명칭도 그대로 따랐다. ③ 교태전은 연회 때 사용되던 건물로, 건물 뒤에 작은 언덕을 조성하여 아미산(蛾眉山)이라 하고 벽돌로 문양을 장식한 굴뚝을 세워 후원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④ 고종은 궁궐 안 북쪽 중앙 가장 한적한 곳에 창덕궁의 낙선재나 연경당과 유사한 주택풍의 건청궁을 세워 왕비와 지내고자 하였다. 20. 서원과 향교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조선시대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숙수사(宿水寺) 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② 향교는 잡상이나 용두 등을 볼 수 없고 대성전마저 익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절제된 단순미를 보여 준다. ③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공간과 학생들을 모아 강학 하는 공간으로 나누어진다. 초창기인 16세기에는 제사의 비중이 높다가 점차 강학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④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성균관의 대성전은 5칸이며 각 주와 각 부의 대성전은 3칸이라고 기록 되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작은 고을의 향교라도 5칸으로 건립되었다. 이 면은 여백입니다.